구원의 길 – 장재형(장다윗)목사

Ⅰ.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믿음으로 열리는 은혜의 세계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4장을 해설하기에 앞서, 로마서 3장 31절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말할 때, 이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해소하기 위한 전제라는 것이다. 복음으로 인해 율법이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율법을 ‘성취’하고 ‘완성’한다는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로마서 4장 전체를 명확히 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율법을 하나의 작은 삼각형이라 비유한다면, 복음은 그 작은 삼각형을 포함하는 더 큰 삼각형이요, 율법이 작은 원이라면 복음은 그 작은 원을 품고 있는 큰 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율법이 결코 무효화된 것이 아니라, 더 큰 은혜의 틀 안에서 그 본질적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 복음이라는 개념이다.

이렇게 복음이 율법을 포괄한다는 관점에서, 구약과 신약 또한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 주는 구원의 두 가지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장재형 목사는 강조한다. 구약에서도 이미 ‘믿음’으로 인한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사건이 계속해서 기록되어 있으며,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에 걸쳐 한결같이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 역시 바로 이 문제를 설명하고자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든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4장을 가볍게 지나치려 하거나, “이건 유대인들을 위한 장”이라고 여기고 5장으로 건너뛰기 쉽다고 한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왜 이렇게 길게, 온전하게 한 장을 할애하여 아브라함과 다윗, 그리고 할례와 율법의 문제를 언급하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 안에는 자기 동족인 유대인에 대한 안타까움과 열정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들이 율법과 은혜의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든 풀어 주고 싶어 했다는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가 특별히 주목하는 대목은, 유대인들 안에 “복음을 받아들이면 율법은 폐기되는 것 아니냐”라는 오해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과 복음이 서로 모순 관계가 아님을 강조한다. 오히려 율법이 지닌 목적이 완성되는 순간, 은혜의 복음이 온전한 의미로 드러난다고 가르친다. 복음은 율법을 배제하지 않고, 율법이 지닌 본래의 목적(죄를 깨닫게 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결국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길잡이가 되는 점)을 온전히 수행해 준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갑자기 신약에서만 새롭게 등장한 교리가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도 일관되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로마서 4장은 바로 그 점을 강하게 부각한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두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이 둘을 택해 끄집어낸 이유가 매우 정교하다고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혈통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유대인들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부라 할 수 있는 왕권의 대표자요, 메시아의 예표가 된 인물이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라는 비유가 나오는데, 그만큼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절대적으로 존귀한 조상으로 여겼다. 또한 다윗은 시편의 많은 부분을 기록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적 혈통을 예표하는 존재였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족보의 기준점으로 삼는다. 결국,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13절, 912절)과 다윗(6~8절)을 언급하는 구조는, ‘유대인에게 가장 권위 있는 두 거인을 통해 복음 진리를 설명해 주는 방식’이라고 장재형 목사는 말한다.

바울이 제시하는 질문은 이렇다. “아브라함과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선택받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는가?” 그 해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갑작스럽게 새롭게 등장한 패러다임이 아니라, 구약 시대부터 지속된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점을 바울이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율법 이전에도 이미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면, 또한 다윗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죄가 사함 받은 자는 복되도다’라고 시편을 기록했다면, 이것이 곧 복음의 토대가 아니겠는가?”라는 바울의 논리를 해설해 준다.

먼저 로마서 4장 1~3절에서 아브라함의 예가 강조된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자랑할 것이 없었다”고 말하는데, 그가 우상 장사인 데라의 아들이었으며 혈통적으로나 인간적 자격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 뽐낼 것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바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강하게 드러내기 위한 서술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이는 그가 공로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고 기록된 것(창세기 15장 6절)은, 율법 이전의 시대에도 이미 ‘은혜로 말미암은 의’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는 결론에 이른다.

장재형 목사는 아울러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가 아니라 보수로 여겨지지만,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은혜를 받은 이가 진정 복 있는 자임을 바울이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것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태복음 20장)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야기(마태복음 9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찍부터 율법을 지키고 스스로 의롭다 여긴 사람들(바리새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체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발했으나, 죄인인 세리가 회개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한다는 역설적 진리가 여기에 담겨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바울이 말하는 ‘행위로 말미암는 공로신앙’의 위험성과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됨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더욱 깊이 들어가면, 시편 32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이 등장한다(로마서 4장 6~8절).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이는 사악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가려 주셨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스스로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죄가 덮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시편 32편 말씀을 인용하며, “다윗도 이미 이 은혜를 경험한 자가 아니냐. 율법과 구약의 예배를 드리고 계율을 지키는 것을 넘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사건이야말로 복음이 가리키는 본질임을 유대인들 자신이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결정적 시점은 그가 할례를 받은 후가 아니라(99세에 할례를 받음), 이미 할례받기 이전(75세경)의 일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할례를 ‘구원의 전제’처럼 여기던 유대인의 사고방식을 깨는 결정적 메시지라고 해설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혈통이나 육신적인 공로나 의식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결과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 로마서 4장을 통해, 구원이 결코 율법적 공로나 혈통적 우월에 기초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그것을 수용하는 믿음에 달렸음을 유대인들에게(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강하게 주장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이 바울의 핵심 논리이며, 바울이 오랫동안 유대 문화권에서 쌓은 율법적 지식과 메시아적 신앙 체험이 한데 어우러진 정교한 가르침이라고 덧붙인다.

결국,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의 앞에 결코 설 수 없음을 알게 하는 장치다. 그러나 복음은 그 죄책과 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대신 짊어지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의’를 선물한다. 바울이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 맥락이다(로마서 4장 15절). 장재형 목사는 율법이 죄를 더욱 자각하게 하고, 인간의 실존을 그 무거운 명령 아래 얽매이게 만들기 때문에 ‘저주’와 ‘정죄’를 피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를 대신 짊어지셨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함을 얻는 것임을 명확히 붙잡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줄곧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풀어 가면서, 결국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은혜의 길임을 제시한다.

Ⅱ. 아브라함과 다윗이 보여 준 믿음: 장재형 목사가 바라본 구약의 ‘은혜’ 증거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4장이 단순히 신학적 개념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구약의 두 대표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역사해 온 증거’를 밝히는 장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숭상하고 존경하는 조상인 아브라함과 가장 찬란한 왕인 다윗, 그 두 인물 모두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이 곧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중핵적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먼저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난 믿음의 핵심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요약된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백 세에 가까웠고, 아내 사라는 경수가 끊어져 이미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이는 불가능을 뜻하는 절망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고,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부활 신앙의 선취’로 볼 수 있다고 해설한다. 로마서 4장 17~19절에 나오듯이,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결국 사라가 잉태하여 믿음의 아들 이삭을 낳았고, 그 후로 하늘의 별과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이 번성하게 되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심을 드러낸 예라고 말한다.

나아가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조차,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보였다. 창세기 22장의 이야기는 결국 아브라함이 ‘죽음조차도 생명으로 뒤바꾸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을 믿었다는 강력한 고백이다. 로마서 4장 20절 이하에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묘사는, 아브라함이 지식이나 합리적 사고로 따져 볼 때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았다는 점을 부각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전폭적 신뢰가, 곧 복음에서 말하는 믿음(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의 원형이라고 설명한다.

두 번째로 다윗의 예가 언급되는데, 장재형 목사는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고 노래한 부분을 주목한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으로 인해 치명적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함으로써 생명을 건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용서 덕분이었다. 율법대로라면 다윗은 죽어 마땅했다. 간음과 살인이라는 중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심으로써 “주께서 죄를 인정치 않으신 사람”이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인간의 처지에서 보면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죄를 덮으시고 다윗을 받아 주신 것은 이미 구약에도 충분히 은혜가 작용해 왔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풀이한다.

이처럼 구약의 두 영적 거인이 동일하게 ‘은혜’와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은 사례라는 점이 바울의 논증 핵심이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때, 바울은 “아브라함조차 율법 없이, 심지어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다윗도 동일하게 죄사함의 은혜를 경험했다. 그렇다면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믿음’으로 열리는 것이 어찌 이상하겠는가?”라고 답변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에서 “바울이야말로 유대인의 역사와 구약 신학을 가장 깊이 깨달은 사도였으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언약을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낸 학자였다”고 평한다. 그 관점에서 보면, 장재형 목사가 바라보는 바울은 단지 신학적 개념 싸움을 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기 민족이 경험해 온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하여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길”로 안내하고자 하는 진정한 목회자요 설교자의 면모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구원은 혈통에 따라 세습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역시 ‘육체를 따라’가 아니라 ‘믿음을 따라’ 다음 세대에 전수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세상적 권력과 부, 그리고 가문이 대물림되듯이 신앙의 직분을 세습하려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로마서 4장이 지적하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고 꼬집는다. 바울은 4장 13절 이하에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신 언약이 율법을 통해 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결코 육신적 기준이나 율법적 공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바를 믿고 그 약속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포하는 셈이다.

Ⅲ.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되는 칭의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4장 마지막 부분(특히 23~25절)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이 아브라함 한 사람만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자에게도 동일하게 의로 여기심을 주신다”고 말한다. 즉, 장재형 목사에 따르면 바울은 구약의 아브라함 사건을 예표 삼아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연결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 “죽은 것 같은 사라의 태에서 생명이 나오리라”는 ‘부활적 기적’을 믿었듯, 신약 시대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에게도 똑같이 영원한 생명과 의로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서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로마서 4장 25절)고 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대속적 죽음과 그 죽음을 확증하는 부활”이라고 정리한다. 죄인이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께서 대신 지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사건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법정에서 무죄 판결, 즉 칭의를 얻는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부활을 통해 그 구속 사역이 완전함이 드러나며, 예수님이 죽음조차도 이기신 분이라는 사실이 나타난다. 장재형 목사는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의 대속 죽음이 가진 능력에 조금도 결함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부활을 통해 구원의 완성이 세상 앞에 선명히 증거되고, 믿는 자들은 그 부활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명확한 자유와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곧 십자가는 ‘죄 사함’을, 부활은 ‘새 생명’을 의미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구원에 관한 바울 신학의 양대 기둥이라고 본다. 바울이 로마서 4장을 통해 증언하려 한 바가 바로 이것이다. 구약 속 아브라함과 다윗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어떠한 방식으로 역사해 왔는지 설명한 뒤, 그 완전한 실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계기를 통해 모든 민족에게 열렸음을 선포한다.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예수께서 내어 주심을 당했다”는 것은, 본래 죄인이 형벌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 예수께서 대신 들어가셨음을 뜻한다. 이를 바울은 때때로 ‘대표 이론’이라고 표현해 왔다고 장재형 목사는 덧붙인다.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가 되어 죄를 퍼뜨렸다면, 예수께서는 새로운 인류의 대표가 되어 죄값을 치르시고 의를 전가해 주는 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 전가’ 혹은 ‘위대한 교환’의 사상은,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넘어가고,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부여된다는 놀라운 복음의 본질이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이 교환의 실재를 정말 가슴으로 받아들인다면, 율법의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확신하게 될 뿐 아니라, 날마다 부활의 생명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율법적 규정이나 혈통적 전통, 인간적 공로나 자랑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자랑하며, 모든 성도가 동일한 은혜를 입었다는 고백 위에서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4장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다윗의 회개 경험을 통해 율법 시대에도 이미 은혜와 믿음의 구원 원리가 작동해 왔음을 보여 주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하게 성취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선포하는 장”이라고 정리한다. 이것은 바울의 본론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인간의 무력함을 선언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 죄를 전부 해결하여 우리에게 의로운 신분을 주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동참하는 길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소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소망 중에 믿었듯, 신약 시대를 사는 이들도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고, 결국 부활의 생명까지 얻게 된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로마서 4장을 통해 되새겨야 할 교훈을 몇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신앙의 본질은 율법 준수가 아니라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구약의 성도들 역시 이미 이 원리를 체험했다는 점에서, 구약과 신약은 단절이 아닌 연속성을 가진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사함의 완성, 부활은 의롭다 함의 확증이자 새 생명의 출발점이다. 넷째,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태도이며,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이런 믿음에 근거한 구원의 공동체는 개인의 공로나 혈통, 지위, 인간적 권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인다.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이야말로, 율법주의에 빠지기 쉬운 교회나, 반대로 율법을 경시하여 복음의 책임을 잊기 쉬운 공동체 모두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중요한 진리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끝으로, 로마서 4장 25절이야말로 구원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요약한 본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여기에 십자가와 부활, 죄 사함과 칭의, 이 모든 핵심 신학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갚을 수 없는 죗값을 예수께서 대신 담당하셨고, 그 대속 사역이 완전함을 증거하는 표지가 부활이다. 믿음이란 바로 그 사랑의 초대를 수용하는 것이며, 아브라함이 목숨 걸고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하였듯이,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며 자기 중심적 삶을 내려놓고,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며, 또한 로마서 4장을 통해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게 전하고자 했던 영원한 복음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로마서 4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 곧 “인간 공로가 아닌 전적인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구약시대부터 연속되어 왔고, 그 정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본 정리의 요지이다. 로마서 4장의 이 큰 흐름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중요한 진리로 적용된다는 점을 끝으로 강조하고자 한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