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은혜 – 장재형목사

장재형(장다윗)목사는 복음서에 기록된 사도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두고,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고백하며, 궁극적으로 어떤 자세로 신앙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묵상을 제시해 왔다. 특히 요한복음 18장 22-27절, 누가복음22장 61-62절, 그리고 마가복음 14장 72절 등에 나타난 베드로의 부인 장면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연약함과 동시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자비와 긍휼이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아래에서는 장재형목사가 설파해 온 이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적인 연약함과 극복,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가져다주는 거룩한 변화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모든 논의는 오직 하나의 소주제, 곧 “장재형목사”라는 키워드로만 분류하여 서술함을 밝힌다.

장재형목사가 자주 언급하는 핵심 중 하나는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하는 그 지점에서 주님은 우리를 붙들고, 동시에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길이 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라는 관점이다.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은 복음서에서 극적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마주하는 ‘신앙적 실패의 가능성’과 ‘은혜로 인한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언급은 (눅 22:61-62, 막14:72 참조) 인간 베드로의 한계를 미리 꿰뚫어 보신 주님의 통찰과 동시에, 그 한계를 넘어 회복에 이르게 하시는 주님의 계획이 담겨 있는 말씀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실패를 아셨으나 그를 영원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실패 이후를 대비하여 준비하시고, 결국 베드로가 회복된 다음에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으로 이끄는 사도로서 살게 하셨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 안나스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다. 이때 폭력이 동원되는 장면이 나온다(요18:22-23). 장재형목사의 해설에 따르면, 안나스가 예수님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이길 수 없었기에 ‘손으로 치는’ 행위를 통해 물리적 폭력으로 대응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라고 대답하신다(요 18:23). 이는 예수님께서 불의한 폭력을 단호하게 지적하시되, 그분 스스로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심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설명하면서, 세상 권력이 영적 진리에 대항할 때 종종 합리적 대화와 논의가 아닌 ‘폭력’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동원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동시에 그러한 폭력적 상황에서도 주님은 스스로를 굴욕시키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진리의 편에 서 계심을 보여 주신다. 따라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불의에 맞서되 폭력으로 맞서지 않는” 영적 태도를 가르치시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안나스가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말씀이 요한복음 18장 24절에 기록되어 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안나스가 “더 이상 예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위 가야바에게 사건을 떠넘겼다고 해석한다. 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처리할 수 없는 문제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김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나아가 안나스와 가야바가 한 집안(장인과 사위의 관계)인 점에 주목할 때, 이들은 종교 권력과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는 연결고리를 통해 예수님을 재판하려 했으나, 결국 진리 앞에서 허술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당시 유대 종교 권력이 어떻게 타락했으며, 표면적 경건함 속에 얼마나 큰 위선이 내재되어 있었는지 보여 주는 대표적 예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 무렵 베드로가 뜰 밖에서 불을 쬐던 사건이 부각된다(요 18:25-27).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요한복음에는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나는 아니라”고 답하는 장면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특히 누가복음 22장 56절)에 따르면, 여종 하나가 불빛에 드러난 베드로의 얼굴을 보고 “당신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아니냐?”라고 지목하는 대목이 좀 더 상세히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여종의 재차 질문으로 인해 베드로가 궁지에 몰리고, 결국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극적 상황이 벌어졌음을 주목한다. 어둑한 불빛 속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알아보기 힘들지만, 장작을 더 넣어 불길이 확 밝아질 때 비로소 베드로의 용모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던 베드로는 더 이상 숨을 수 없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전면 부인하기에 이른다.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의 부인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하면서,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직면하는 두려움과 인간적 연약함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핵심 예시라고 말한다. 당시 베드로에게는 구체적인 위협이 있었다. 예수님을 체포하고 심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베드로 역시 같은 죄목, 즉 ‘반체제 인물’이나 ‘신성 모독자’로 몰릴 가능성이 있었다. 당장 체포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스스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제자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러나 복음서들은 그 부인을 단순한‘의도치 않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거부’로 묘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주여, 내가 주와 함께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 22:33)라고 호언장담했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베드로 자신의 확신과 공언, 그리고 실제 행동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부인의 사건에서 핵심은 ‘부인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이후 베드로가 어떤 마음의 변화를 겪었느냐에 있다. 누가복음22장 61-62절에서는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고 기록한다. 장재형목사의 설교에 따르면, 예수님의 시선과 그 시선 안에 담긴 자비, 그리고 “내가 너의 배신을 이미 알았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베드로에게 커다란 충격을 줬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내가 정말로 이분을 버렸다. 내가 이분이 누구이신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두려움 때문에 그 관계를 부인했다’라는 뼈저린 자각에 사로잡혔고, 그로 인해 밖으로 나가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마가복음 14장72절에서는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고 기록해, 베드로의 후회를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닭 울기 전’이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닭이 울기 시작하는 새벽 시각은 대략 3시 전후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한밤중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결정적 분기점이다. 주님은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가장 어두운 밤의 끝자락, 곧 새벽이 오기 직전에 베드로가 최악의 배신을 할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베드로의 마지막 부인이 끝나자마자 닭이 울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중요한 영적 교훈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극심한 흔들림을 겪는 순간은, 실은 ‘새벽’이 오기 바로 직전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어둠이 가장 깊은 순간이 동트기 직전인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주님의 큰 빛이 임하기 직전, 또는 돌파구를 눈앞에 두고 가장 격렬한 시험과 유혹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 결정적 순간에 결국 베드로는 무너졌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닭이 울자, 곧바로 베드로도 울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깊은 회개의 눈물”이라고 묘사하며, 이 회개가 곧 베드로를 다시 세우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요한복음 21장에 가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장면이 등장한다(요 21:15-17).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이 질문은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세 번의 고백’으로 회복시킴으로써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강력한 상징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미 자신의 실패를 절감했고, 통렬한 슬픔과 회개의 과정을 지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를 다시 불러 세워 “내 양을 먹이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베드로에게 사도로서의 권위와 책임을 새롭게 위임해 주셨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이 기독교 복음의 정수라고 본다. 인간은 연약하여 언제든 넘어질 수 있지만, 주님은 그 넘어짐을 영원한 파멸이 아니라 “성장과 새 출발의 통로”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사건을 보면, 성령의 강림 이후 베드로는 이제 더는 겁에 질린 제자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로 변화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지적하며, 실패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사도행전 4장 6절, 12-13절에 나타난 기록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예수님을 심문했던 안나스와 가야바, 요한과 알렉산더 같은 대제사장의 문중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두려움 없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라고 외친다.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려져 있던 베드로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담대함으로 오히려 종교 권력을 향해 복음의 진리를 설파하는 장면이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는 언약이 성취된 결과라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해설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나아가, 베드로의 변화가 “단지 개인적 자아 실현”이나 “리더십의 회복”을 넘어서, 교회를 세우는 견고한 반석으로서의 사명을 이룬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거듭 묻고,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내 양을 먹이라”며 사도적 직무를 부여하셨다(요 21:17 참조). 그렇기에 베드로의 실패와 회복이 가지고 있는 파장은 베드로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초대교회의 형성과 확장, 그리고 궁극적으로 전 세계적인 복음 전파의 초석이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주님께서 실패한 자를 회복시키심으로써 도리어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여전히 모든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에서 재현될 수 있는 은혜의 원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성도들은 누구나 연약하고, 여러 모양으로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부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님의 눈빛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베드로가 그랬듯이 회복과 사명의 길이 열리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베드로가 통곡하며 회개했던 그 ‘울음’의 본질을 주목한다. 이는 세상적 후회나 감정적 눈물이 아니라, 말씀을 기억해 낸 데서 비롯된 거룩한 통회였다. 즉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그 경고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말씀을 저버렸음을 처절히 깨달았다. 그 깨달음에서 터져 나온 눈물이기에, 이는 복음의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말씀 중심의 회개’였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그분의 은혜를 갈망하는 눈물이야말로 성도가 반드시 경험해야 할 영적 돌파의 과정이라고 역설한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회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주님을 부인하고 외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깊은 참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복되는 과정을 통해, 장재형목사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부인’을 넘어선다”라는 메시지를 제시한다. 인간 편에서는 죄와 배반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배반조차 염두에 두고, 십자가로 모든 죄의 값을 치르셨다. 그래서 베드로가 비록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를 찾아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으로 다시금 기회를 주신다. 이것은 주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부인하지 않으시는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주님을 부인해도, 주님께서는 끝내 우리를 부인하지 않으신다”라는 말로 이를 정리한다.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항상 미쁘시다”(딤후 2:13)는 진리가 베드로의 사건을 통해 구체화된 것이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 기록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듭 강조한다. 주님은 미리 “사탄이 베드로를 시험할 것”을 아셨고, 그 시험에서 베드로가 완벽하게 승리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아셨다. 그러나 동시에 베드로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세우는 도구로 사용될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는 주님의 예지(豫知)와 동시에 예정(豫定)하심이 베드로 개인을 어떻게 주도적으로 인도하시는지를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수를 미리 보셨을지라도, 그 실수가 결코 우리의 끝이 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더욱 겸손해지고, 진짜 주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며,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회복의 길을 열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은 ‘주님을 부인하거나 십자가를 버리는’ 일이 단순히 “교리적으로 예수님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충분히 “예수님을 부인하는 행위”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진리를 대변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자리에서, 세상의 눈치와 비난이 두려워서 침묵해 버리는 태도, 혹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임을 공적으로 드러내야 할 때 슬쩍 물러서는 행동 등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십자가의 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며 스스로 십자가를 내려놓는다면, 그것 역시 오늘날의 베드로의 부인이 될 수 있다. 결국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2,000년 전 특정 인물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반복되는 인간의 연약함을 대변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건은, 그와 같이 실패하거나 넘어질 때가 오더라도 “주님이 여전히 우리를 붙드신다”라는 강력한 위로를 준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고 통곡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목적은 베드로의 파멸이 아니라 그의 회복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직접 찾아오심으로써 그 모든 걸 확인시켜 주신다.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의 눈물을 두고, 이것이 “단지 죄책감의 눈물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시선 때문에 터져 나온 회개이자, 동시에 주님의 사랑을 발견한 기쁨의 씨앗이었다”라고 해석한다. 그렇기에 베드로가 흘린 눈물은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시고 용납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와 죄스러움이 뒤섞인 눈물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를 넘어 변화로 나아가도록 하신다”는 점에 복음의 능력이 있다.

장재형목사는 종종 이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묵상하는 설교에서, “우리가 닭 울기 직전에 넘어지고 포기하는” 상황을 더욱 경계하자고 강조한다. 신앙의 시험과 고난은 때로 우리를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재정적 어려움, 건강의 문제, 관계의 깨짐, 불확실한 미래 등이 한꺼번에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 나를 돌보시는가?”라는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 그 결정적 순간에 믿음을 지키고 조금만 더 인내하면 새벽이 밝아오는데, 어둠이 가장 짙은 새벽 직전의 시점에 무너져 버리는 안타까운 일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바로 그 ‘닭 울기 전’의 결정적 시간에 주님을 부인했고, 직후에 새벽이 왔다. 만약 베드로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붙들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베드로는 부인했고,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를 끝내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세워 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며, 동시에 도전이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남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 자체를 돌아보면, 예수님의 체포와 고난은 인간의 죄악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분은 무죄하셨으나,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와 탐욕, 정치 권력의 무관심과 불의함 속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셨다. 군중들은 한때“호산나”를 외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로 태도를 바꾼다. 제자들조차 다 뿔뿔이 흩어졌고, 베드로는“수제자”로까지 불리던 인물이었음에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 상황은 완전한 실패요, 좌절이요, 철저한 버림받음이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극단적 실패가 예수님 부활을 통한 새 시대 개막의 전주곡이었다고 역설한다. 십자가의 희생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고, 제자들의 연약함은 성령의 임재를 통해 담대한 증거자로서의 소명으로 전환되었다.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그 대표적 예화로서, “좌절과 배반의 끝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회복”을 보여 주는 결정적 사례라는 것이다.

여기서 장재형목사가 한층 더 깊이 들어가 언급하는 부분은 ‘사탄의 요구’다. 앞서 언급한 누가복음 22장 31절에 따르면, 사탄은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예수님께 요구했다. 이는 욥기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욥기에서 사탄은 욥의 경건함이 단지 물질적 축복 때문이라며, 하나님께 욥을 시험해 보도록 허락을 요구한다. 결국 욥은 심각한 고난을 당하지만, 끝내 믿음을 지키고 더 큰 복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혹독한 시험을 받았고, 일시적으로 무너졌으나, 회개와 성령 체험을 통해 강건한 믿음의 사도가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는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고 넘어뜨리려고 할 수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해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빚어 가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해석한다. 사탄의 의도는 파멸이지만, 하나님은 그 파멸 위에서 회복과 성장을 일으키신다. 이 역설적 원리가 바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 신자들에게 큰 위로이자 경각심을 준다.

따라서 장재형목사는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당부가 결코 형식적이거나 추상적인 교훈이 아님을 강조한다. 베드로는 최후의 만찬 이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잠들어 있었다(마 26:40-41).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며 제자들을 깨우셨지만, 그들은 제대로 기도하지 못했고, 결국 베드로는 실제 시험의 순간에 넘어지고 말았다. 장재형목사는 그 사실에 주목하여, 우리의 영적 삶도 실제로는 비슷한 길을 간다고 말한다. 편안하고 안일한 시기, 혹은 영적 긴장감을 잃었을 때, 어느새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과 타협의 여지가 슬그머니 자라난다. 그리고 결정적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우리도 모르게 주님을 부인하거나 도망칠 수 있다. 따라서 항상 깨어 있고 기도함으로써, 기도 속에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구함으로써, 시험을 이겨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결코 ‘베드로의 실패담’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전체 복음의 맥락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드라마”로 해석한다. 아울러 궁극적으로는, 이 부인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는 과정에서 누구도 완벽한 자가 없음을 보여 주심과 동시에,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시고 끝내 회복시키시는 구세주”이심이 선포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더욱이 장재형목사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베드로의 실패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솔직하게 전승해 온 사실에 주목한다. 초대교회가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적 부끄러움을 넘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우리의 자랑이 된다”는 진리를 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교회가 인위적으로 베드로의 실패를 감추려고 했다면, 복음서 기록과 사도행전 증언에 이런 생생한 내용이 담길 리 없다. 하지만 베드로조차 실패했음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자비가 어떤 사람도 회복시키실 수 있음을 증언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장재형목사는 첫째로 “내가 아무리 수제자처럼 주님을 잘 안다고 확신해도,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교훈을 준다고 말한다. 둘째로 “넘어졌을 때 결국 회복의 길은 주님의 말씀과 시선을 다시 마주하는 것”이라 한다. 베드로는 통곡하며 밖으로 나갔고, 부활 후 다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회복되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부인하고 죄에 빠질 수 있지만, 회개하며 주님의 사랑을 붙들면 결국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셋째로 “시험과 환난은 우리를 낙담시키려는 사탄의 도구이지만,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통해 우리를 더 강건케 하신다.” 베드로는 처음엔 실패했으나, 나중에는 예수님을 담대히 증언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교회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베드로가 부인했던 상황’과 유사한 갈림길에 자주 놓이게 된다고 말한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복음적 가치를 지키는 문제,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갈등 속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 교회 안팎의 여러 압박과 비난 속에서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태도” 등을 두고, 우리도 “나는 그를 모른다”며 부인하고 싶어질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베드로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켜 닭 울기 전의 위기를 넘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넘어질 수 있고,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베드로의 이야기가 보여 준다. 회개와 믿음의 갱신을 통해, 주님은 실패마저도 새 출발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하신다. 결국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 고정되고, 그분께서 내 실패를 이미 아시면서도 사랑과 용서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붙들 때, 우리는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의 길을 이어갈 수 있다. 이 모든 여정에서 장재형목사는,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이야말로 궁극의 회복을 가져오는 열쇠라고 설파한다.

종합하면,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인간의 연약함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동시에, 그 연약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가 폭발적으로 계시된 장면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새벽이 오기 바로 직전”의 가장 힘든 순간에도 주님을 붙들고, 때로 넘어질지라도 회개와 사랑의 고백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선포한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 교회 공동체가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원리는, 연약함이나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고백함으로써 성령의 능력 안에서 더 큰 변화와 회복을 경험하는 길을 배운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베드로가 그러했듯이, 우리가 회복된 후에는 형제들을 굳게 세우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교회와 사회 속에서, 또는 개인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해야 할 때 주저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믿음을 감추거나, 혹은 세상 기준에 타협하며 주님을 ‘부인’하는 모습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부인하는 죄에 빠졌을 때에도 낙심하지 말고, 베드로처럼 돌이켜 “심히 통곡”하며 주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주님은 이미 모든 실패를 아시고, 용서와 회복의 손길을 펼치고 계신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일은 그 손길을 외면하지 않고, 다시금 “내가 주님을 사랑하오며, 주님이 누구신지 압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고,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부인 사건이 주는 복음적 역설이며,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는 주님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실제로 위기 앞에서 후퇴하고 마는 나약함이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베드로의 회개와 회복을 통해 ‘참된 소망’을 볼 수도 있다. 주님은 우리를 미리 아시고, 우리의 실패를 넘어서 구원의 길과 사명의 길로 인도하신다. 비록 밤이 깊고 닭 울기 전의 시간은 더없이 두렵고 암담할지라도, 새벽은 반드시 밝아온다.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은혜”는 우리가 상상조차 못할 방식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다. 이 점을 붙들 때, 우리의 신앙 생활은 단순한 윤리적·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안에 거하는 살아 있는 관계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관계의 깊이를 더해 가는 길이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깨어 있는 기도, 그리고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붙드는 믿음”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바로 이 길을 걷는 이들이 모두 “영적 베드로”가 되어, 주님의 양을 먹이고 돌보며 세상을 섬기는 사람으로 서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결론적으로,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복음서 전체와 사도행전이 이어지는 맥락 속에서, “결정적인 실패를 통해 오히려 결정적인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는 역설”을 담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현대 교회의 현실과 접목하여, 누구든 인생에서 신앙적 실패를 경험할 수 있음을 인정하되, 그 실패로 인한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의지하여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십자가에서 죽음의 모든 값을 치르신 예수님은 결국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보증하셨다. 베드로가 이 은혜를 체험한 것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도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이 메시지가 바로 장재형목사가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통해 계속해서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복음은, 어두운 밤이 지나 닭이 우는 순간이 되면 주님께서 예비하신 새벽의 빛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한없는 사랑을 증언한다. 우리는 그 사랑 앞에 늘 깨어 있고, 회개와 고백을 통해 언제든 주님과 동행하는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으며, 그 여정 속에서 더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이끌 수 있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베드로의 부인이 주는 “복음의 역설”이며,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신앙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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