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장재형목사

1. 성령의 열매의 본질 – 사랑, 희락, 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는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열된다. 사도 바울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고 명시하며,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선언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맺어야 할 열매들이며, 서로 긴밀히 연결된 덕목들이다. 바울은 그중에서도 ‘사랑’을 첫 번째로 언급한다. 장재형(장다윗)목사 역시 여러강론에서, 이 사랑이야말로 나머지 여덟 가지 열매를 통합하고 이끄는 핵심 덕목임을 강조한다. 성경 전체를 흐르는 구원 역사속에서, 성령의 열매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구체화된 삶의 모습”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이 사랑에서부터출발하여, 기쁨(희락)과 평화(화평)로 이어지는 은혜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밝히는 첫 번째 열매인 사랑은, 세상에서도 흔히 입에 올리는 ‘사랑’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차원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발견한다. 세상도 수많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인간적인 욕망이나 감정으로 기울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보이신 ‘아가페적 사랑’이다. 이는 조건 없이 베푸는사랑으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로마서 5장은“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자주 인용하며, 인간이 결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복음의 심장부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설파해 왔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맺어야 할 첫 열매가 ‘사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왜 사랑이 성령의 열매 중 가장 으뜸이며, 나머지 모든 열매를 통합한다고 할 수 있는가?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위상을 가장 아름답고 명료하게 설명한다.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은사나 지식이 많아도, 내가능력이 뛰어나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헛된 것이라고 한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고, 사랑이 온전히 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된다. 여기서 ‘안다(야다)’라는 히브리어가 ‘사랑한다’는 의미와 결부된다는 통찰은 매우 깊다. 구약성경에서“사람이 그 아내를 알았다”고 표현할 때, 단순 지식이 아니라 친밀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 그 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곧, ‘알다’라는 것은 ‘사랑하느냐’와 연결된 핵심 개념이다. 주님은 우리를 아신다는 것, 즉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며, 그 사랑 때문에 우리 또한 주님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인간이 먼저 시작한 어떤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사랑을 배우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곧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아셨고, 우리를 사랑하셨다”라는 고백에서출발해야만, 성령의 열매로서의 참된 사랑이 우리 안에 뿌리내릴 수 있다. 이런 사랑이 있어야만, 이후 바울이 제시하는 희락과화평, 그리고 다른 모든 덕목이 제대로 꽃필 수 있다. 사랑은 결코 고립적이지 않다. 사랑 안에는 기쁨이 흘러나오며, 그 기쁨이주변에도 전이되어 화평까지 이어진다.

두 번째 열매인 희락(기쁨)은 사랑과 동전의 양면이다. 사랑받는 자는 기쁘다. 사랑을 베푸는 자도 기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 안에 있을 때 가장 깊은 기쁨을 누린다. 세상적 쾌락이 아닌, 영적인 진정한 기쁨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사랑 안에 거하는 이들이 누리는 희락은 단순한 감정적 즐거움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채워진 상태다. 사랑할 때 기쁨이 넘치고, 그 기쁨은 더욱 큰 사랑을 낳는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진정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하면자연스럽게 공동체 안에 기쁨이 솟아나고, 그 기쁨은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영적 생동감이라 설명한다. 그 기쁨을 통해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살아 계신 주님을 목격하게 된다.

세 번째 열매인 화평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평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신 것처럼, 이 화평은 세상적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 정도로 협소하게 이해되거나,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을 때 느끼는 안정감 같은 것이지만, 성령의 열매로서의 화평은“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평안”이다. 바울이 서신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 가운데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할 때, 은혜가 먼저 오고, 그 은혜를 받아 누릴 때 마음에 평강이 임한다는 순서가 있다. 이는 ‘조건 없는 구원’이라는 놀라운은혜를 통해, 더 이상 죄책과 정죄감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들이 누리는 내면의 쉼이다. 장재형목사도 여러 설교에서, 교회 공동체가 은혜 속에서 서로를 수용할 때 그 안에 깊은 화평이 자리 잡게 되며,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한다고 강조한다.

화평이 임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 11-13절에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율법적 잣대에 갇혀 늘 비판과 교만에 빠지면, 사람들의 마음은 좁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경험한이들은 마음을 넓힐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공로이기 때문이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은혜로 자랐으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허물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율법주의자들에게는 ‘답답함’과 ‘비판’이 가득하지만, 은혜주의자들에게는 ‘여유’와 ‘화평’이 넘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야 할 진정한 모습이다. 사랑이 바탕이 되고, 그 사랑에서 기쁨이 터져 나오며, 그 기쁨 안에 은혜가 충만하여 화평에 이르러, 공동체가 서로의 허물을 감싸주고 세워주는 곳이 바로 교회의 본 모습이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의 기초를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너희가 율법을 더 지켜야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라는 식으로 새로운 규범을 강요했고, 그 결과 교회 안에는 분열과 갈등이 생겼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됐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 사랑과 기쁨, 그리고 화평이 넘쳐야 하는데, 율법주의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자꾸 분열로 몰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 율법이 아니라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라”라고 강력히 권면한다. 장재형목사 역시, 교회의 분열이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결국 은혜를 잃어버리고 율법적 태도를 취할 때 생긴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통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열매가 차례로 내 삶에 맺힐 때, 교회 공동체가 진정한 화평을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성령의 열매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사랑, 희락, 화평에 대해서 성경은 쉬지 않고 강조한다. 사랑하면 기쁨이 생기고, 기쁨이 넘치면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달아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다. 이것이 바울이 “금지할 법이 없다”고 선언한 성령의아름다운 작동 방식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 사랑이 깊어질수록, 거기서 파생되는 기쁨과 평안은 한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울은이어서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는 일련의 덕목들을 언급함으로써,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 양식으로 드러나야 함을 일깨운다.

소주제 2: 사랑의 실천 –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

사랑, 희락, 화평이 성령의 열매의 기본 토대라면, 그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생활 속에서 열매 맺고 발전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덕목들이 바로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다. 사랑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 삶에 적용되고 실천될 때 비로소 열매가 된다. 바울은 이를 ‘성령으로 사는 자’가 ‘성령으로 행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라고 강조한다. 장재형목사는이 부분을 자주 설교하며, 교회 안에 바른 교리나 말씀 이해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삶에서 실현되어야 ‘성령의 사람’으로서의 성숙을 이룬다고 말한다.

첫 번째로, 오래 참음이다. 이것은 ‘인내’ 혹은 ‘참고 견딤’이라고도 번역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오래 참음은 단순히 고통을 묵묵히 견디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참는 능동적 태도를 뜻한다. 사랑이 없으면 쉽게 포기하고, 쉽게 분노하거나 좌절해 버리지만, 사랑이 있으면 상대를 향한 긍휼의 마음과 은혜가 있기에 오래 참을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절에서 “모든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말한다. 결국 오래 참음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했기에, 우리가 때로 억울함을 당하거나 고난이 올 때도,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요, 사랑의 삶이다.

오래 참음이 우리 안에 자리 잡으면, 다음으로 자비가 흘러나온다. 자비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베풀 수 없기 때문에, 자비 역시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흘려보낼 수 있다. 자비는 본질적으로 남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온 생애를 통해 자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죄인들, 세리와 창기, 병자와 장애인,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다가가셨고, 함께 식사하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셨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는 궁극적 자비를 보여 주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받은 자비를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사람이다. 장재형목사는 설교 중에, 교회가 이자비를 실천하지 않을 때, 세상은 교회를 지적하고 비판하기 시작한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말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자비로운태도로 이웃을 섬기는 모습이 먼저 나타나야 한다. 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맺히는 열매이기에 가능하다.

자비가 적극적으로 표현되면, 그것이 ‘양선(善)’으로 이어진다. ‘양선’은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단순히 착한 일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말한다. 우리가 의지로 선을 이루려고 하면 실패하기 쉽다. 그러나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자연스럽게 선한 마음을 주시고, 선한 행동으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야고보서 2장 26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며, 선한 행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고 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든, 세상 속에서든, ‘양선’은 성령의 열매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선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감당해야 함을 이야기할 때, 바로 이 ‘양선’을 핵심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스도인이 삶의 자리에서 선을 실천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현실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다음 열매는 충성이다. 사람들은 흔히 ‘충성’을 말할 때, 군대적 관점이나 조직 충성을 떠올릴 수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신실함,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책임 있게 헌신하는 태도를 포괄한다.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흔들리지 않는 신뢰 속에 거한다는 의미다. 동시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달란트의 이야기를 보면, 착하고 충성된 종은주인이 맡긴 것을 잘 관리했고,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는 칭찬을 받았다. 충성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성실함이고, 다른한편으로는 공동체나 다른 이들을 향한 책임감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충성된 태도로 섬길 때교회가 견고해지고, 직분을 잘 감당할 때 세상이 교회를 보고 존경하게 된다고 말한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충성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성령 안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일곱 번째 열매로 언급되는 온유는 성숙함의 상징이다. 농경 생활에 비유하자면, 곡식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영적으로도성숙한 사람은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자연스럽다. 온유한 사람은 남을 정죄하기보다, 그를 품어주고 이해하려 한다.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하신 대목(마 11:29)은,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직접 보여 주신 가장 결정적 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마구 과시하거나 사람들을 억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하셨고,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이 온유함의 절정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원수까지도 불쌍히 여기고 품는 마음을배운다. 장재형목사는, 온유한 사람에게는 영혼을 살리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강압적 태도가 아닌, 사랑으로 품는 마음이 결국에는 더 큰 생명의 역사를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세상의 지식이나 기술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성령의 열매로서만 얻을 수 있는 보석 같은 자질이다.

마지막 아홉 번째 열매는 절제다. 절제는 ‘self-control’로 번역되기도 하며, 스스로를 잘 다스리는 능력을 의미한다. 성경은 인간의 자아가 죄성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여러 군데에서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육체의 욕망을 따르고, 타인을 해치려는 마음이나 시기, 분노 등에 쉽게 휩쓸린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은 스스로를 제어할 줄 알게 된다. 먹고 마시는생활 습관에서부터, 말과 행동, 그리고 성적인 분야에 이르기까지, 절제는 진정한 자유를 위한 필수 덕목이다. 왜냐하면 방종은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노예 상태이기 때문이다. 절제가 있는 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 바울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전 6:12)고 말할 때, 바로 이 절제의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절제를 “자발적 순종”이라 표현하며, 성령 안에서 기쁘게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즐거운마음으로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이 일련의 열매들은, 우리의 인격과 삶 전반을 변화시킨다. 갈라디아서 5장 23절은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세상의 그 어떤 제도나 법도 이 덕행을 막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랑과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모든 상황,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존중받을 수밖에 없는 가치다. 참된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와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자주 실패하며 넘어질 때가 많다. 갈라디아서 5장 25-26절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당부한다. 이는 “성령으로 살아가라. 그리고 실제 삶에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라”는 주문이다. 그렇지 않을 때, 교만이나 헛된 영광을 추구하게 되고, 결국 시기 질투나 다툼에 빠져 버리게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 죄의 기원을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담이 범죄한 죄는 교만이었다. 무한하신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인간의 높아지려는 마음에서 죄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가인은 동생 아벨을 향한 시기 질투로 인해 살인죄를 범했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을 향한 교만(수직적 죄)이었고, 가인의 죄는 형제를 향한 시기 질투(수평적 죄)였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서 시기 질투가 일어나면 반드시 분열이 찾아온다고 지적한다. 인간적 교만이 스며들면 “내가 율법을 더 잘 지켰다”는 식으로 우월 의식을 갖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정죄하게 된다. 그것이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바울은 갈라디아서5장 26절에서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지 말지니라”라고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분열을 예방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람은결국 ‘사랑’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율법주의를 넘어서는 복음의 핵심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어떻게대하셨는지를 요한복음 8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율법대로라면 그녀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써, 율법주의자들의 숨겨진 죄성을 드러내셨고, 궁극적으로 여인을 용서하시며 “다시는 죄를범치 말라” 하셨다. 이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과 용서를 보여 주신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정죄 대신 속죄를 선택한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받은 자이며, 동시에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탕감받고도, 정작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종의 비유를 드시면서, 용서하지 않는 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셨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므로, 마땅히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메시지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복음의 정신을 ‘십자가 정신’이라 칭한다. 십자가 정신은 남을 정죄하기보다, 그의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품어주려는 태도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며, 형제의 연약함을 정죄하기보다, 오히려 그의 짐을 함께 지며 회복을 도모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다. 사랑은 실천되어야 하며,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형태로 우리의 일상에서 구체화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제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2. 서로 짐을 지는 삶과 그리스도의 법 – 교만과 시기 질투를 넘어

갈라디아서 6장으로 넘어가면, 바울사도는 더욱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전개한다. ‘윤리(ethic)’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며, 구체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관념적 사상이 아니라, 삶의 실제 현장에서 드러나야 할 능력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부분을 설교할 때마다, “진리는 머릿속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실제 삶에서 구현될 때 비로소 사람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한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바울이 “신령한 너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북돋우기 위한 목회적 지혜이자, 동시에 그들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게 하려는 의도다. 실제로 그들중에는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져, 남을 정죄하기 바쁜 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오히려 “온유한 심령으로 범죄한 사람을바로잡으라”고 말한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정죄하기보다 용서와 회복으로 인도하라”는 요청이다. 무조건 면죄부를 준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으로 그 영혼을 돌아보고 살려내라는 말이다.

바울은 이어서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덧붙인다. 즉, 나도 죄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며, 오늘은 저 사람이 죄에 빠졌지만 내일은 내가 넘어질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가지라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도 “선 줄로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통찰하고 있는 말씀이다. 우리가 남의 죄를 본다 해도, 그것을 가지고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우쭐댈 수 없다. 모두가 잠재적으로 넘어질 수 있는 존재이기에, 오히려 겸손히 서로를 돌아보며 돕고,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기록된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신비이고, 예수님의 삶에서 보여 주신 ‘속죄 정신’의 근본이다. 율법주의자들은 남의 죄를 지적하고 돌을 던지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무리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 하시며, 결국 아무도 돌을 들지 못하게 하셨다. 그 이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죄인은 죄인을 정죄할 수 없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심으로, 진정한 용서를 베풀고자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정죄에서 속죄로 건너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남의 약함과 허물을 내 일처럼 함께 짊어지는 태도를 말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바울은 일컫는다. 율법주의자들은 “죄를 지었으니 벌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대응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내가 대신 짐을 지겠다. 함께 가자”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의 상처와짐을 함께 지려고 애써야 한다. 그런 삶이 곧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힘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서로의 짐을 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회복될 때 그 문제가 풀린다”라고 여러 차례 설교해 왔다. 결국 교회가 분열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짐만 무겁다” 하고, “너는 왜 그것도 못 하냐”고 남을 탓하며, 서로 감싸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세계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내가 당신의 짐을 함께 지겠다. 혹은 당신이 내 짐도 함께 져 달라. 우리 함께 가자.” 이것이 공동체가 살아나는 길이다.

바울은 6장 3절에서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고 말한다. 스스로 착각하여, “나는다 이뤘다. 나는 율법도 잘 지켰고, 모든 조건을 만족시킨 완벽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기만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일 뿐이지만, 때로는 거룩한 체하며 자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런태도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바울은 계속해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6:4)”라고 강조한다. 이는 남을 심판하는 데 골몰하지 말고, 먼저 내 영혼을 살피고 내 믿음을 점검하라는 뜻이다.

나아가서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6:5)”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서로의 짐을 함께 져야 하지만,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내가 책임져야 할 삶의 영역도 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각자 자신의 삶을 결산해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 그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았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너는 누구이며, 나와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라는근본적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것이 신약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가르치는 메시지이며,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의 뼈대다.

갈라디아서 6장 1-5절의 이 가르침은 단지 개인 윤리에 머물지 않고, 교회 공동체 전체에 적용된다. 서로 짐을 지고, 서로를 온유하게 바로잡으며, 스스로는 겸손히 내 약함을 돌아보는 자세가 확산될 때, 교회는 건강하게 자라난다. 성령의 열매가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장면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리를 볼 때다. 그 사람을 맞이하며 함께 기뻐하는 것이 교회다. 바울은 이미 갈라디아서 5장 26절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지 말라”고 했고, 6장에서도 이어지는 취지로, 복음의공동체가 가져야 할 자세를 설명했다. 결국 교만이나 헛된 영광, 시기 질투가 얼마나 해로운지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서 “서로짐을 지는 공동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아담의 교만, 가인의 시기 질투로 인해 인류의 죄 역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듯이, 교회 안에서도 교만과 시기 질투가 들어오면 곧바로 분열과 파괴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그 해법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한 성령의 열매를 통해 답을 찾을 수 있다. 사랑과 기쁨, 화평이 공동체의 기초를 이루고,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더해지면, 결국 서로를 감싸고 세우는 공동체가 된다. 누군가 죄에 빠지면, 그를 내치거나 정죄하는 대신,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고, 내가 넘어진다면 형제들이 나를 일으켜 줄 것이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자’가 ‘성령으로 행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복음의 핵심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살리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자주 말한다. 십자가의 길이그러했고, 초대교회가 보여 준 모습도 그러했다. 사도행전 초기에 나타난 교회는 서로의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필요한자들에게 나눠 주면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는데, 거기에 인간적인 이기심이나 욕심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곧바로 문제가발생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로 교회를 돌보며,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는 질서를 세우려고 애썼다. 그것이교회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부흥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 5장 22절부터 6장까지 이어지는 바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성령의 열매는 ‘사랑’에서 시작되어 ‘절제’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내적·외적 변화의 과정이다. 둘째, 사랑과 기쁨, 평화를 누리되, 교만이나 시기 질투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당부한다. 셋째, 누군가 범죄하거나 연약함에 빠졌을 때, 율법주의적 정죄가 아니라, 복음의 정신으로 온유하게 권면하고, 함께 짐을 지는 공동체를 이루라고 촉구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그리스도의법을 성취하는 길이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눈총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종종 ‘율법주의적 정죄’에 사로잡혀 서로 상처 주고 분열하는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가 풍성해진 교회라면, “우리 안에 죄가 있을 때 어떻게 치유하고 회복할 것인가?”라는 문제에대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해법을 자연스럽게 찾게 된다. 예수님의 길이란, 내 죄뿐 아니라 다른 이의 죄도 품고 기도하며 함께 회복을 이루어 가는 길이다.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말씀은, 바로 십자가의 정신을 지향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실제적 명령이다. 장재형목사가 줄곧 강조해 온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십자가에서 베푸신 용서가 필요하다. 이 사실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 정죄하기보다는 “형제여, 자매여, 내가 함께 짐을 지겠다”는 말로 응답할 수 있다. 그러면 교회는 싸우는 곳이 아니라, 회복과 치유가 있는 곳,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곳이 된다. 갈라디아서가 던지는 이 메시지를 붙들 때, 우리가 정말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며,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남겨 준 귀한 가르침이다.

결국, 성령의 열매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삶으로 드러날 때에 비로소 빛을 발한다. 사랑은 하나의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고, 기쁨과 화평은 그 사랑에서부터 샘솟으며, 오래 참음과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그러한 공동체적 삶의한복판에서 구체적으로 꽃피어 난다. 우리가 교만과 시기 질투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길”을 진심으로 따를 때, 교회 안의 상처나갈등도 ‘서로의 짐을 지는’ 방식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열린다. 정죄의 언어 대신, 격려와 회복의 언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성령의 역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터치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 간다.

장재형목사가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누차 강조하듯, 우리가 정말 복음을 붙들고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면, 율법주의가 가져오는 분열과 증오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는다. 그 자리를 대신해 “내가 너의 짐을 지겠다. 너도 내 짐을 함께 져 달라”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울려 퍼질 때, 바로 그곳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 현장이 된다. 이처럼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선포하는 ‘성령의 열매’와 ‘그리스도의 법’은, 단지 개인적인 신앙심의 표지가 아니라, 교회 전체와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복음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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