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우리가 묵상할 본문은 고린도전서 8장 1절,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는 말씀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1세기 고린도의 특수한 논쟁에 가두지 않고, 오늘 교회와 성도가 맞닥뜨리는 수많은 문화·양심·자유의 문제를 풀어내는 해석의 열쇠로 제시한다. 그의 논지는 분명하다. 판단 기준은 ‘신학적으로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형제를 사랑하고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가’에 있다. 지식과 자유가 진리의 토대라면, 사랑은 그 진리를 살아 있는 집으로 세워 올리는 골조다. 사랑이 빠진 지식은 교만으로 굳고, 절제 없는 자유는 방종으로 흐르며, 결국 교회는 서로를 상처 입히는 논박의 광장이 된다. 반대로 사랑으로 다듬어지고 덕으로 절제된 지식과 자유는 연약한 지체를 보호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의 목회적 심장을 읽어낸다. 바울은 ‘이론의 승자’를 가리는 논객이 아니라 ‘형제의 생명’을 지키는 목자였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교차로였다. 상업과 쾌락의 도시, 신전이 숲처럼 들어선 종교의 집결지. 제사의 고기는 신전의 수입원이 되어 시장으로 흘러들고, 빈민 구제의 명목으로 배급되기도 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거주하고, 그리스 철학과 동방의 신비사상이 뒤섞인 문화적 혼종 속에서 교회는 피할 수 없는 질문과 마주했다. 시장의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을 수 있는데 먹어도 되는가. 불신자 식탁에서 음식이 제물임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우상숭배에서 막 벗어난 양심과 새롭게 세워지는 공동체의 정체성에 맞닿은 문제였다. 어떤 이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 성도에게 우상의 더러운 것과 피와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하라 권면했다며 금지를 주장했고, 다른 이는 예수께서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을 들어 자유를 주장했다. 성경의 가르침이 충돌하는 듯 보일 때 교회는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시선을 주목한다. 바울은 텍스트를 텍스트로만 맞붙여 결론을 내리지 않고, 복음의 중심(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회의 목적(덕을 세움)이라는 축으로 텍스트들을 통합한다. 공회 결의는 공동체의 화평과 우상문화로부터의 분리를 위한 최소 장치였고, 예수의 선언은 정결례 중심의 외적 규율을 넘어 마음의 중심을 겨냥한 복음의 원리였다. 둘은 상충하지 않는다. 사랑과 덕 위에 놓일 때 온전한 조화를 이룬다.
논쟁의 당사자는 크게 두 부류였다. ‘강한 자’로 불리던 이들은 단단한 신학적 지식으로 무장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한 분뿐이며, 피조물은 그분의 선한 창조에 속한다. 그러니 우상제물 자체가 신자를 더럽힐 수 없다는 논리는 일견 빈틈이 없다. 장재형목사는 이들의 지식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 문제는 지식의 사용법이었다. 그들의 지식은 사랑을 섬기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연약한 자의 양심을 누르는 무기로 변했다. 신전 연회 자리에 거리낌 없이 앉아 고기를 먹으며, 주저하는 형제를 향해 “믿음이 약하다”고 단정하는 순간, 참된 앎은 교만으로 뒤틀린다. 바울의 단호한 경고—“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세우려는 의지가 없는 지식은 더 이상 복음의 지식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반대편에는 ‘약한 자’들이 있었다. 우상숭배 문화에서 갓 벗어난 이들은 머리로는 우상이 허상임을 이해하지만, 양심은 아직 과거의 그림자에 민감했다. 신전에서 고기를 먹는 ‘지식 있는 형제’의 행동을 보고 용기를 내 따라했다가 곧 죄책감과 혼란에 빠지는 일이 일어났다. 바울은 이 순간을 심각한 영적 사태로 본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형제가 나의 자유로 실족한다면, 그 자유는 사랑의 법정에서 유죄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시선을 따라 “내 양심만 평안하면 된다”는 개인주의적 경건을 넘어 “남의 양심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절제하는 사랑”이 복음의 성숙이라고 요약한다.
바울의 해법은 단순하면서도 혁명적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각 사람은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라.”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묻지 말고 먹어라. 땅과 거기에 충만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자의 집에서 차려준 것은 감사함으로 먹어라. 그러나 누군가가 “이것은 제물”이라고 알려주면, 그 말을 한 이의 양심과 그 자리에 있을지 모를 연약한 자를 생각해 먹지 말라. 내 자유가 타인의 양심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절제’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신약의 자유 개념이라고 정리한다. 자유란 하고 싶은 대로 할 권리가 아니라, 해야 할 사랑을 선택할 능력이다. 참된 자유는 사랑으로 자신을 제한할 줄 아는 힘이며, 그 제한이야말로 타자를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는 창조적 에너지다. 그래서 바울은 과감히 말한다.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그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 이것은 윤리의 최대주의가 아니라 사랑의 최소주의, 곧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지 않게 하려는 복음의 최소 요구다. 바울에게 형제의 양심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가장 조심히 보호해야 할 상처 부위였고, 그 몸을 해치는 죄는 곧 그리스도를 거슬러 범하는 죄였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고기 대신 다른 ‘문화적 제물’들로 가득하다. 술과 담배, 도박과 포르노, 각종 엔터테인먼트, 소비 문화, 심지어 신자유주의적 성공신화까지 우상적 상징을 두르고 우리를 유혹한다. 이것들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단칼에 자를 수 있을까.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기준을 그대로 가져온다. 첫째, 복음의 중심에서 시작하라.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가 마음의 왕좌에 있을 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된다. 둘째, 양심의 울림을 귀히 여겨라.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권면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영혼을 지키는 규범이다. 셋째,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가를 물어라. 나의 선택이 어떤 신호로 읽히는지, 연약한 자에게 어떤 허용의 길을 여는지, 지도자의 행동이 곧 문화적 기준을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넷째, 남의 양심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보라. 신앙에서의 손해는 복음에서의 이익이다. 한 영혼을 건지고 교회의 화평을 지키는 일이라면 나의 자유는 기쁨으로 제한될 수 있다. 다섯째, 거룩한 울타리를 세워라.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린다”는 전도서의 경구처럼, 자기 삶에 경계를 두는 지혜는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가 아니라 참된 자유를 지키는 담보다. 이 울타리는 타인을 정죄하려는 장벽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 이웃을 보호하려는 사랑의 경계다.
바울이 경계한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사랑으로 조율되지 않은 지식의 오만이었다. 교리의 정통성은 필수지만, 정통성은 언제나 사랑의 실천으로 검증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신학과 영성, 개인 경건과 공동체 윤리의 균형을 제시한다. 바른 신학은 바른 삶을 낳고, 바른 삶은 바른 신학을 증언한다. ‘나는 안다’는 확신과 ‘나는 사랑한다’는 헌신이 충돌할 때 우리는 반드시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께 ‘알려진’ 자가 참으로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알려졌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뜻이며, 그 사랑은 언제나 형제의 유익을 구하고, 자유를 사랑으로 줄이며, 권리를 복음으로 내려놓는다. 이것이 바울이 몸으로 증언한 복음의 윤리이자, 장재형목사가 오늘 제자들에게 거듭 강조하는 제자도의 길이다.
구체적 장면을 떠올려 보자.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신앙을 시험하듯 술잔을 권한다. 법으로 금지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함께 신앙을 배우는 후배가 그 자리에 있고, 그는 알코올 중독의 가족사를 갖고 있다. 이때 나의 자유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식은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말할지 몰라도, 사랑은 “오늘 나는 자유를 내려놓겠다”고 답한다. 교회 리더가 대중문화를 즐기는 모습을SNS에 가볍게 올린다. 본인에게는 거리낌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게시물이 연약한 이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지켜온 울타리를 허물게 만드는 허용의 신호가 될 수 있다. 이때 사랑은 묻는다. 이것이 유익한가, 덕을 세우는가, 한 영혼을 살리는가. 어떤 가정은 자녀 교육을 위해 미디어 사용에 엄격한 기준을 세운다. 세상은 고루하다고 비웃을지 몰라도, 그 기준이 영혼을 지키는 지혜라면 그 가정은 흔들림 없이 걸음을 지킨다. 사랑은 때로 구식처럼 보이지만, 그 ‘구식’의 울타리가 다음 세대를 살린다.
결국 고린도전서 8장의 쟁점은 정체성으로 모인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지식인 이전에 사랑받은 자요, 자유인의 탈을 쓴 방종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부름받은 종이다. 교회는 지적 탁월함과 문화 감수성만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사랑으로 서로의 약점을 덮고, 덕으로 모난 부분을 다듬고, 은혜로 부족함을 채울 때 교회가 세워진다. 장재형목사는 ‘강한 자’가 먼저 낮아져 연약한 자의 속도를 맞추는 것이 성숙의 표지라 말한다. 빨리 가는 것이 리더십이 아니다. 함께 가는 것이 리더십이다. 혼자 멀리 가는 것이 능력이 아니다. 공동체와 끝까지 가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그래서 바울은 음식이라는 사소한 문제에서도 끝까지 사랑의 논리를 밀어붙인다. 사소한 데서 사랑을 양보하면, 중대한 데서도 사랑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소한 데서 사랑을 지키면, 중대한 순간에도 사랑이 우리를 붙든다.
바울의 결론은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영광은 추상적 표어가 아니다. 형제를 살리고, 교회의 덕을 세우고, 복음의 길을 곧게 하는 구체적 선택들 속에서 드러난다. 내 앞의 한 조각 고기, 한 잔 술, 하나의 게시물, 하나의 소비, 하나의 제의 문화 앞에서 우리는 매번 같은 질문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사랑인가. 덕을 세우는가. 한 영혼을 보호하는가. 복음의 전진에 유익한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교회가 이 질문들 앞에 다시 서기를 요청한다. 지식의 교만을 버리고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성숙의 길, 자유를 사랑으로 절제해 형제를 살리는 제자도의 길,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자의 길로 나아가자고 초대한다. 고린도전서 8장은 과거의 난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지혜다. 사랑이 지식을 품고 덕이 자유를 이끌 때,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이 된다. 그 집의 기둥은 그리스도의 사랑이고, 지붕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 아래서 연약한 자는 쉬고, 강한 자는 섬기며, 모두가 함께 자란다. 이것이 바울이 꿈꾸던 교회요, 장재형목사가 오늘 우리에게 제시하는 교회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