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율법과 은혜 – 구원의 길을 조명하다
로마서 10장은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향해 품고 있는 간절한 소원을 다시금 강조하며, “율법과 은혜”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장으로 유명하다. 동시에 이는 이방인들과 비교하여 왜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지 못하고 빗나갔는가 하는 문제를 해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를 비롯한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로마서 10장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율법”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율법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결국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라는 은혜에 있다고 설명해 왔다. 결국 인간이 ‘자기 의’를 세우고자 율법을 도구화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본문이다. 이 장을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믿음 생활을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반성해 보는 데 핵심적 통찰을 제공한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 이어 10장에서도 자신의 동족, 즉 이스라엘에 대한 동일한 마음을 드러낸다. 10장 1절에서 그는“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라고 말한다. 이미9장 서두에서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라고 하며, 이스라엘을 향한 자신의 애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의 소원은 이스라엘이 진정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 개인의 정서적 애착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일차적으로 부름 받은 선민인 이스라엘이 마땅히 누릴 은혜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바울은 로마서 9장 30-31절에서 이미 논지를 펼쳐 둔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이 율법에 이르지 못하고,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이 도리어 믿음에서 난 의를 얻었다.” 이 역설적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해답을 10장으로 넘어오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는데, 바로 이스라엘이 율법을 통해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면서 정작 참된 의, 즉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자기 의’를 의지하며 그것을 자랑하는 신앙은 결국 참된 복음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10장 2절에서 바울은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라고 진술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보여 준 열심은 부정되지 않는다. 다만 그 열심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문제였다. 바울 스스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자신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박해와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에 이르기까지 체포영장을 들고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갈 만큼 열심이었지만, 그 열심은 복음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불타올랐다. 즉,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열심은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바울은 몸소 경험한 셈이다.
바울이 “그들이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후, 이어서 3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지적하는 부분이 핵심이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바로 그‘복종’의 문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이는 율법 그 자체를 향해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이 자기 자랑과 자기 의를 우선시해 버린 태도를 고발하는 것이다. 오히려 율법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 일컬어졌다. 다시 말해 율법은 인간을 참된 의로 나아가게 하는 불완전한 안내자나 전단계이지, 구원을 실질적으로 완성해 주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선언한다. ‘마침’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오랜 세월 여러 해석이 제시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폐지’라고 이해하기도 했지만, 바울의 의도는 “종결”과 “완성”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헬라어로 ‘텔로스(telos)’는 어떤 과정을 통해 완성점에 이른다는 뜻이며,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내가 율법을 폐하려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듯이,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완성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완성은 오직 “은혜”라는 길을 통해 드러난다. 율법의 요구를 전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가 아니라, 은혜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결국 은혜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삶,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곧 은혜다. 이 은혜를 통해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고, 율법이 지적하던 모든 죄책에서 자유롭게 된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선언하셨을 때 나타난 자비가 바로 그 은혜의 구체적 모습이다. 율법은 죄를 밝히 노출시키지만, 그 죄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이다. 이것이 율법의 요청을 완전히 충족시킨, 곧 율법을 마침(완성)한 사건이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과 은혜를 대립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율법이 있었기 때문에 선민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는가”를 인정한다. 동시에, 율법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의를 얻으려 했던 것은 인간의 한계로는 불가능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은혜가 그 율법을 완성한다는 점을 논증한다. 즉, 율법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 백성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새 법이 나타나자 율법의 본래 목적(인간을 죄에서 건져내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로마서 10장 5절 이하에서 바울은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라고 하며 레위기18장 5절을 인용한다. 구약 레위기의 핵심 가르침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킬 때 생명이 보존된다는 사실이다. 인간뿐 아니라 온 피조물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를 때에 생명을 누린다. 식물은 뿌리가 물을 찾아 내려가고 잎이 햇빛을 향해 뻗으며, 동물은 저마다의 생태적 리듬과 방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법도’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법도가 주어졌고, 구약 시절 그것이 ‘모세의 율법’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이 인간에게 실제로 완전한 의를 가져다줄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바울은 율법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율법을 지키려 해도 전적 순종을 이룰 수 없으므로 결국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끌어진다.
이를 보완하는 길이 바로 6절 이하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바울은 신명기 30장 11-14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하늘에 올라가거나 바다(무저갱)에 내려가서 가져올 필요가 없다, 이미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구약에서 율법이 주어지는 과정도 결국 하나님이 먼저 주도하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아왔듯이, 인간이 공로로 율법을 성취해 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도 인간이 하늘까지 올라가거나 땅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예수를 억지로 끌어올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삶(성육신, 사역, 십자가 죽음, 부활)은 이미 우리 곁에 임하였고, 그 은혜는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로마서 10장 9-10절에서 바울이 제시하는‘구원론’의 핵심 공식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 진술은 복음주의 신앙 전통에서 예수 영접을 강조할 때 단골로 인용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울은9절에서 입을 먼저 말하고, 다음에 마음을 말한 후, 10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다시 보충한다. 결국 마음으로 믿는 것이 우선이며, 그 다음에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라는 점을 확실히 짚어준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였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과거의 유대인들이 “나는 아브라함의 혈통이다”라는 이유로 자동 구원을 주장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나는 교회에 오래 다녔으니 구원받았다”고 안주하는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은 결코 혈통이나 배경, 종교적 열심만으로 얻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음으로 믿고, 그분을 진정한 주(Lord)로 시인하는 ‘개인적인 믿음의 결단’에서 비롯된다.
즉, 율법을 통한 열심의 신앙과 은혜를 통한 믿음의 신앙을 비교할 때, 바울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행함’과 ‘노력’이지만, 결국 인간은 그 행함을 완벽히 이룰 수 없기에 자기 의를 세우게 되고, 자칫 복종을 가장한 영적 교만에 빠질 수 있다. 반면 은혜의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뤄 놓으신 구원의 결과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에베소서 2장 8-9절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10장 11-13절에서 바울은 다시금 구약(이사야 28장 16절과 요엘 2장 32절)을 인용하며,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한다. 이 선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보편적 메시지다. 이렇듯, 율법이 특정 민족(이스라엘)에게 주어졌고 그들에게 구별된 삶을 살게 했지만, 결국 그 율법이 지향했던 참된 의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 인류에게 열렸음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로마서 10장의 맥락이다.
바울은 이어서 14-17절에서 구원의 과정, 즉 “어떻게 사람들에게 믿음이 생기는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전파하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들을 수 있으며,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을 수 있느냐?”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 역사 전반에서 복음 전파, 곧 선교와 전도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면, 마음으로 믿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사도적 사명을 받은 이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고,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는 구약의 말씀이 여기 인용된다. 곧 선교의 사명을 받든 자들이 발 벗고 나섰을 때, 복음이 전달되고, 그 들음으로 인해 믿음이 생겨나며, 그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장재형목사 또한 여러 설교와 강해를 통해 이 본문을 인용하면서, 복음 전파의 핵심 정신이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증거함”에 있음을 거듭 강조한 바 있다. 어떤 이들은 전도와 선교를 지식이나 논리, 혹은 교세 확장의 방법 정도로만 이해하기도 하지만, 로마서 10장에 비추어 볼 때 진정한 복음 전파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심령에 새기고, 들은 자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는 단지 교회에서 ‘행사’처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 곳곳에서 우리가 직접 복음을 전해 듣고, 전해 주는 ‘영적 교류’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결국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요약하면,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인간의 한계를 진단하며,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율법 자체는 구원에 이르게 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국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패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이 지향하는 바, 즉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 회복”을 사랑의 길을 통해 성취해 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나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나, 율법을 통해 자기 의를 세우는 태도는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 그분의 은혜 덕분이기 때문이다. 열심을 품되, 그 열심의 초점이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사랑이어야 한다.
아울러, 이스라엘이 결국 실패하게 된 근본 원인은 “듣지 않음”과 “복종하지 않음”에 있었다고 로마서 10장은 결론지어 간다. 말씀이 그들 가까이 있었으나,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도 동일한 도전을 받는다. 오늘날에도 말씀을 풍성히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정작 그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삶으로 실천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 듣기만 하고 아무런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과 같은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불신 –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우리의 반성
바울은 로마서 10장 후반부(18-21절)에서 다시금 이스라엘의 불신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즉, 말씀을 ‘듣지 못했다’가 아니라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다’라는 것으로 진단한다.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은 복음이 선포되는 장면을 직접 체험했고, 구약 성경 전체로부터 예언된 메시야 사상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바울 자신도 율법에 능통하고 구약에 박식했지만,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복음을 박해했던 사람이었다. 그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전혀 듣지 못해서 몰랐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을 귀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정도로 마음문을 닫았다는 것이 바울의 지적이다.
19절에 언급된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라는 문맥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이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시기심을 일으키며, 그들로 하여금 돌이키게 할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구약 성경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종종 다른 민족들을 도구로 사용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깨우치셨다. 이 말씀을 로마서에서 재인용함으로,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방인이 구원을 얻고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갈 때 이스라엘이 자극을 받아 마땅히 자신들의 위치를 재인식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부분은 계속 복음을 거부했고, 결국 이 구원은 널리 이방으로 확장되었다.
20절은 이사야 65장 1절을 인용한다.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이것은 이방인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게 되는 사건을 예언적으로 시사한다. 신약 시대에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혈통적으로는 유대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던 이방 민족들이 대거 복음을 영접했고,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로마서10장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자랑했음에도, 정작 복음 앞에서는 불신과 거부로 일관했다. 그들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것을 놓쳐 버렸고, 은혜를 입지 못했다.
21절에서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라고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기다림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먼발치에서 기다리다가, 아들이 돌아올 때 달려 나가 그를 껴안는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긴 시간 손을 내밀고 계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실제로 와서 복음을 전하시는 순간까지도 마음을 닫았다. 그 결과, 로마서 9장에서 이미 설명된 것처럼, 그 구원의 열매는 이방인들에게도 활짝 열렸다. 바울은 이 과정을 가리켜 “자연 가지들이 꺾이고,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접붙임 받았다”라고 비유한다(롬 11장 참조). 그만큼 이스라엘의 불신이 컸고,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패한 게 아니라, 인간 편에서 순종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오늘날 이 메시지를 묵상하며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다양한 교회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이야기를 단지 과거의 교훈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직접 적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신앙의 역사가 길고, 교회 전통에 익숙하며, 성경 지식이 풍부하다고 해서 자동으로 ‘복종’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입술로 주를 시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마음으로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서 자기 의와 교만에 빠진다면, 그 모습이 곧 과거의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도 “열심은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 반면에, 율법을 갖지 못한 이방인들은 오히려 복음의 은혜에 감격하여 믿음을 갖게 되었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며 큰 기쁨 속에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바울의 논증이 21세기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유는, 교회와 성도들이 여전히 “내가 본다”라고 자부하거나, “나는 이미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고 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가 소경 되었더라면 차라리 죄가 없겠거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이 영적 무지 상태에 있음을 인식조차 못 하고, 오히려 ‘나는 안다’, ‘나는 의롭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던져진 무서운 경고였다. 이스라엘을 경계로 삼아, 우리는 “혹시 나도 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고 성찰해야 한다.
결국 로마서 10장 전반의 메시지는 ‘복음을 영접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지 차별 없이 구원받는다’는 희망과 함께,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이 임할 수 없다’는 경고가 양면적으로 펼쳐져 있다. 바울의 결론을 따라가 보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복음의 핵심 원리가 다시 확인된다.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 곧 믿음이 열쇠다. 그러나 그 믿음은 무턱대고 생겨나지 않는다. 말씀을 들어야 하며, 그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결단이 입술의 고백과 삶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며, 성도 각자가 그 복음을 실제로 듣고 깨달아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책임을 지닌다.
바울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했을 때, 그는 스스로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 같은 직분을 가진 사역자는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지상명령을 주셨을 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 명령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한다. 성도라면 누구나 ‘좋은 소식’을 입술로 전할 사명을 가진다. 가족 안에서, 직장과 일터에서,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시요, 율법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증거해야 한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대목에서, 현대 교회가 놓치기 쉬운 복음 전파의 열정에 대해 자주 일깨운다. 교회 성장의 논리나 기관 운영의 방법론을 넘어, 실제로 한 영혼 한 영혼이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이 보여 준 불신과 불순종의 예는 “들어도 믿지 않고, 설령 믿는다 하여도 그 믿음이 자기를 높이고 자기 공로를 드러내는 데 쓰인다면” 결국 하나님의 의를 놓치게 된다는 엄중한 사실을 알려 준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암송과 기도, 금식, 헌금 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기와 세리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하시며, 그들이 빗나간 종교적 자만심을 꾸짖으셨다. 성경 지식이 많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은혜에 무릎 꿇어 하나님께 복종하는 태도”에서 확인된다.
이스라엘의 예에서 보듯이, 지식 자체나 율법이 문제라기보다는 ‘복종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마음’이 근본적 장애가 된다. 그 마음으로 인해 입술은 하나님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이것이 곧 10장 21절에서 말하는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의 모습이다. 사람은 말로는 “주여, 주여”를 외치면서도, 정작 행동으로는 자기 생각과 자기 욕심을 따를 때가 많다.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로마서 10장은 구원론, 특히 칭의(의롭게 되는 것)와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큰 통찰을 준다. 과거 유대교 전통 안에서는 율법 준수가 구원의 핵심 요소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인간은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따라서 구원도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부활이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증언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라는 구절은, 믿음의 본질이 ‘마음에서의 영적 동의와 수용’에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을 받아들이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을 살아 계신 주로 믿는 것, 그때 비로소 의롭다고 칭함받고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와도 직결된다. 복음을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는, 단순히 ‘예수님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라는 이기적 바라기(소위 기복 신앙)가 아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라는 부활 신앙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 사역의 결정적 증거인 동시에, 그분이 지금도 살아 계시며 우주의 주이심을 보여 준다. 믿음이란, 그 놀라운 주권 앞에 우리가 자신을 굴복시키고, “주님이 나의 왕이시며, 내 삶의 통치자이십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라는 문구를 넣었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믿고, 그분을 주로 시인하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참된 복종과 순종의 길에 들어선다.
로마서 10장 후반부(18-21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듣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다”는 점을 환기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특권이 있던 그들이 오히려 다른 민족보다 더 끈질기게 메시야를 거부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혀 준다. 결국 그들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복종”을 회피했다. 이스라엘이 가진 지식은 풍성했지만, 그것이 “올바른 지식”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은혜를 구하지 않았다. 바울은 하나님이 종일토록 손을 벌리고 기다리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데, 인간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의를 세우려고 할 때, 그 관계는 계속 틀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이 구원 밖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이방인이 새롭게 구원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계획 실패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부터 11장까지 장대한 논증을 통해, 이방인들의 구원까지 포함한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론을 설명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시계 안에서 정해진 때에 이스라엘도 구원에 참여하게 될 미래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11:25-26).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이 지금 당장 이스라엘에게 외치고 있는 말이다. “너희가 말씀을 이미 들었다면,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구원을 받으라.” 불신을 지속하는 것은‘구원 역사의 문’ 바깥에 스스로 머무는 선택이 되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현대를 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는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늘 입으로 말하면서,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된 마음의 믿음에 이르도록 돕고 있는가? 그리고 나 자신은 어떠한가? “내 마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있는가? 혹은 교회 생활과 성경 지식, 봉사 활동 등으로 내 의를 쌓고자 하며,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 로마서 10장은 우리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의 의에 기초한 겸손한 복종의 길로 인도한다.
복음이 ‘가까이에’ 있으며, 심지어 우리 입과 마음 안에 있다고 했을 때, 바울은 그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적극적이고 즉각적으로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복음은 머나먼 이상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그리고 그 사랑이 교회를 통해, 성경을 통해, 또 다른 성도들의 간증과 증거를 통해 계속 우리에게 전해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 복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듣기만 하고 지나쳐 버릴 수 있고, 혹은 자신에게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들음’이 일어나려면 마음을 열고 깊이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듣는 순간, 믿음이 싹트고, 그 믿음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이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들을 수 있도록, 사랑과 은혜의 손길을 멈추지 않으신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강의에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강조하곤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겨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로마서 10장 17절의 가르침을 실제로 체화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적 귀가 늘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예배에서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을 읽을 때, 혹은 소그룹 묵상과 나눔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을 듣는다.그러나 진정한 ‘들음’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으로 그 말씀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때 믿음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영혼의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이 된다. 여기에는 매일의 영적 훈련이 수반되어야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수많은 잡음과 미디어, 정보 속에서 분주하지만, 의도적으로 주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확보하고,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로마서 10장은 구원론과 선교론, 그리고 이스라엘론이 긴밀히 결합된 장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자리에서 이방인이 도리어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온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얼마나 넓고 풍성한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단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교회 역사를 통해 줄곧 반복되어 왔다. 복음을 가까이에서 듣던 사람들이 오히려 그것을 하찮게 여기고, 멀리 있던 이들이 그 말씀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지금도 일어난다. 이는 “주여, 주여” 하고 외치는 교회 안의 사람들 중에도 마음으로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있을 수 있고, 교회 밖에서 방황하던 이들이 오히려 말씀을 듣고 큰 감동과 회심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경우가 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종일토록 손을 벌려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 초대에 응하는 길은 오직 믿음과 복종이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임을 자각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알게 한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의 핵심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미 모든 길이 열려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고, 부활로 그 능력을 확증하셨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은혜를 자기 의를 내려놓은 채 받으려 하느냐, 아니면 자꾸만 불순종과 불신의 자세로 밀어내느냐다.
로마서 10장의 마지막 절(21절)은 이처럼 안타까운 느낌으로 끝난다.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신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한 문장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罪性)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초대하시는데도 흔쾌히 나아가지 않고, 때로는 딴 길로 가고 싶어 하며, 자신의 계산과 자존심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종일” 손을 벌리시며 기다리신다. 마치 아버지가 탕자를 향해 달려가듯, 우리를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신다. 이것이 복음이 가진 위대함이다. 누구든지 그 품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마치 처음부터 택하신 자녀인 양 맞이하신다.
이제 이 메시지를 우리의 신앙에 적용해 보면, 첫째, 율법과 은혜의 문제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율법이 죄를 들추어내지만, 그 죄를 없애는 능력은 은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적으로라도 자기 의를 내세우는 태도를 경계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해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불신을 반면교사 삼아, 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교회의 오랜 전통, 뛰어난 신학 지식, 활발한 봉사나 열심조차도 마음 깊은 복종 없이는 사상누각이 될 수 있음을 경고로 삼아야 한다. 셋째,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들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많은 목회자들이 끊임없이 호소하듯, 교회 내부적으로나 외부로 향해서나 복음을 전하는 데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전도가 프로그램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복음의 생명력이 흘러넘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표현이 될 때, 듣는 이에게 믿음이 생기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렇듯 로마서 10장은 신앙생활의 본질적 문제들을 짚어 준다. 바울의 애절한 동족 사랑은 오늘날 우리가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와 열정으로 연결된다. 이스라엘 백성조차 놓쳐 버린 복음의 기회를, 어쩌면 우리도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한다. 복음은 멀리 있지 않다. 이미 가까이 와 있고, 마음에 들어와 있고, 우리의 입술로 시인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듣지 않으려는 고집, 복종하지 않으려는 교만만 버린다면, 그 복음은 능력이 되어 우리를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 것이다.
결국,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전체의 모토가 10장에서도 선명하게 제시된다. 율법은 수고와 노력을 통해 의를 얻으려는 시도였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고 수용함으로써 의에 이르는 길을 연다. 이 길이 모든 이방인에게 열렸고, 이미 우리에게도 열려 있다. 바울이 이 사실을 설명함에 있어서 가장 애통했던 부분은, 정작 이스라엘이 그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택함 받은 백성이 이 복음을 거절하는가?’라는 탄식이 깔려 있는 동시에, ‘하나님이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부요한 은혜를 허락하셨으니, 그 누구도 배제될 이유가 없다’는 희망이 함께 나타난다.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복음을 스스로 제한하거나,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거나, “그건 다른 사람에게나 해당되지, 나와는 무관하다”고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로마서 10장은 이 시대 교회에 보내진 일종의 각성제다. 입으로만 시인하고 마음은 닫아 두는 위선, 혹은 복음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는 불신앙, 혹은 교회 내의 형식적 의식과 자기 의에 대한 집착 등, 모든 위험을 경고한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종일토록 손을 벌리고 기다리신다. 은혜의 복음은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누구든지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확실한 약속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로마서10장이 전달해 주는 가장 귀하고도 복된 소식이며,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설교자들이 시대를 초월해 계속해서 선포해야 할 메시지다.
로마서 10장은 우리에게 두 가지 핵심 진리를 분명히 보여 준다. 먼저,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은혜가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아무리 커도, 완전한 순종을 통해 의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사랑이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며, 구원으로 인도한다. 이것이 은혜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불신은 곧 불순종이었고, 그 불순종 앞에서 하나님은 종일토록 손을 벌리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살피면서도,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언뜻 보기에 복음은 쉬운 것 같으나, 실제로 그 복음 앞에 복종하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기에, 이스라엘도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이스라엘조차 결국 구원의 대열로 부르시는 섭리를 갖고 계시며, 이방인인 우리가 그 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두셨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복종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율법의 조항을 지켜서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며, 삶의 순종으로 나타내는 여정이다. 로마서 10장은 이 과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장 중 하나이며, “말씀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들을 귀를 열면, 복음의 믿음이 싹틀 것이고, 우리는 구원에 이르리라”는 희망적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날마다 복음을 들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함으로써 의롭다 칭함받는 복된 길을 걸어가길 소망한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가 받은 이 은혜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며, 아직 듣지 못했거나 듣고도 마음을 열지 못한 이들에게 ‘좋은 소식’을 담대한 발걸음으로 전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며, 로마서 10장에서 시작되는 바울의 열정 어린 호소가 우리 각인의 심령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자리 잡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