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1장 16–17절은 기독교 역사의 흐름을 돌려놓은 말씀으로 평가받는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길을 붙였던 자리에도,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을 적셨던 자리에도 이 말씀이 있었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 목사 역시 이 구절을 자신의 사역 방향을 결정짓는 중심 진리로 삼아왔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노라…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이 두 문장은 바울 시대의 제국 한복판과 오늘의 한국 사회에 이르기까지, 복음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을 날카롭게 비춘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로마의 권세 아래 주눅 들었던 초대 교회와 현대 도시 속에서 신앙을 간신히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를 정면으로 연결해 보여준다.
그는 먼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깊이 들여다본다. 당시 로마 교회는 학문과 사회적 지위 면에서 보잘것없는 이들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였다. 병사와 철학자, 정치가들로 둘러싸인 제국의 중심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신’을 믿는다는 고백은 언제든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바울이 “우리는 만물의 찌꺼기”라고 말했던 표현은 단순한 자조가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받던 사회적 평가였다. 장재형 목사는 이 배경을 오늘의 신앙 현실에 포개며, 세상의 시선 앞에서 움츠러드는 우리의 마음을 정직하게 직면하게 한다. 그리고 그 위축 앞에서 바울의 고백은 거대한 제국 위에 울리는 메아리처럼 들린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카라바조의 명작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성 마태의 소명」에서 어둠을 가르고 들어온 빛이 마태의 얼굴을 비추는 장면은 복음의 힘이 은밀하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열어젖히는 방식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마태가 스스로 빛을 찾은 것이 아니라, 빛이 그의 숨겨진 자리까지 침투해 들어온 것처럼, 복음도 사람이 스스로 끌어올린 의지가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바울의 표현을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그림의 구조 속에서 설명한다.
이어지는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는 본문 역시 장재형 목사의 해석 안에서 선교적 울림을 지닌다. 이것은 배타적 선택이 아니라 순서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유대인을 통해 여셨으나, 그 사랑은 곧바로 이방 세계로 흘러갔다. 복음은 한 민족이나 계층에 머무는 메시지가 아니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버려진 이들에게까지 흘러들어가는 확장성을 가진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속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리스도의 육체는, 인간의 절망을 그대로 껴안은 복음의 몸을 보여 준다.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에 걸려 있던 그 그림은, 하나님이 가장 낮은 자의 고통 속으로 내려오셨다는 선포였다.
장재형 목사는 이어 바울의 표현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구절을 통해, 율법적 의와 복음적 의의 차이를 분명히 한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의로움이 곧 조건과 판단의 언어로 규정된다. 지키면 의롭고 어기면 정죄받는 구조.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다. 율법은 죄를 드러낼 뿐, 죄를 제거하는 힘은 없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한다.
반면 복음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는 전적인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결정적 사건이 바로 그 의다. 중국의 ‘의(義)’ 자가 양(羊)이 나(我)를 덮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설명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죄인의 위에 어린 양이 덮일 때 하나님은 죄가 아닌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보신다. 이때 ‘의’는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선언이 된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처럼, 종이었던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순간, 그의 신분 전체가 뒤바뀌는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표현은 장재형 목사에게 있어 믿음의 지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믿음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계속 자라나는 여정이다. 구원의 시작도 믿음이요, 성숙의 길도 믿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우리 쪽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 편에서 다가오는 신실하심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점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이 말하듯, 은혜가 구원의 객관적 현실이라면, 믿음은 그 현실을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손과 같다.
이 믿음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이해하자면,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가 떠오른다. 마리아는 거대한 사명을 영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응답한다. 믿음은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받아들이는 내적 수용이다. 이렇게 시작된 믿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며 또 한 번의 믿음을 낳는 과정이 곧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복음의 계보다.
바울이 인용한 하박국의 말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시대적 상황에 비춰볼 때 더 깊은 음영을 가진다. 바벨론의 공격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의인은 눈에 보이는 어떤 전략과 능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생존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뿐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메시지를 다시 로마서로 가져와, 제국의 압도적인 힘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이미 생명의 편에 서 있다고 해석한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는 이 진리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하나님의 손은 힘차게 뻗어 있고, 아담의 손가락은 떨리면서도 그 손길을 향해 나아간다. 구원을 이루는 결정적인 순간은 하나님 쪽에서 시작되지만, 아담의 미약한 움직임 없이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믿음은 바로 이 떨리는 손가락 하나를 내미는 행위다. 엄청난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손을 뻗는 것. 그 순간 인간은 절망에서 생명으로 건너간다.
결국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고백은 심리적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실제로 능력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존재의 선언이다. 복음이 하나님의 의라면, 그 의를 믿는 자는 이미 살아 있는 자다. 제국이 무너져도, 문명이 뒤바뀌어도, 역사 속의 흐름이 바뀌어도, 이 원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진리를 바탕으로 설교하며, 바울처럼 ‘패배자의 자리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다시 들려준다. “하나님의 의가 당신을 덮을 때, 당신의 삶은 새로 쓰인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율법적 사고의 질식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내가 이만큼은 해야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겠지”라는 공로 의식과, “실패했으니 하나님도 나를 포기하셨을 것”이라는 왜곡된 죄책감은 복음을 무력화시킨다. 복음이 능력이 아니라 이론이 되고, 신앙은 활력을 잃는다. 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강해는 이 벽을 단호히 무너뜨린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성적표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된 은혜라는 사실을 반복해 일깨운다. 의인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
렘브란트가 빛과 어둠을 통해 인간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자비를 동시에 그려냈듯, 로마서 1장 16–17절은 죄의 실상과 은혜의 장엄함을 한 화면에 펼쳐 놓는다. 우리가 얼마나 깊은 그늘 아래 있었는지를 잊지 않을 때, 복음의 은혜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 감격이 다시 믿음으로 번지고, 또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세우는 불씨가 된다. 어느 시대든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오늘도 이름 없는 신자들, 장재형 목사와 같은 설교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이 시대의 로마를 향해 말씀하신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때, 복음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라, 가장 찬란한 영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