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自意)의 감옥을 허물고 은총의 광장으로: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로마서 15장의 ‘사랑론’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시린 침묵은 격렬한 설전이 끝난 직후의 정적 속에서 흐릅니다. 서로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내뱉은 논리의 칼날들이 사방에 흩어진 자리에는, 승리의 환희 대신 상처 입은 영혼들의 신음만이 가득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불협화음은 우리가 복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해박하고, 지나치게 논리적이며,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는 확신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나의 신학적 정통성, 나의 효율적인 사역 매뉴얼, 내가 정의라고 믿는 가치가 타인의 존재를 압도하려 드는 순간, 생명의 공동체는 숨을 멈추고 질식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위기의 지점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논쟁에서 이기려 하는가, 아니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려 하는가?”

로마서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15장은 단순한 도덕적 훈계나 에티켓에 관한 조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의 이익 집단이나 동호회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존재론적 신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이 본문을 강해하며,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유일하고도 찬란한 표지는 오직 하나, 즉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기꺼이 짊어지는 십자가의 역설’**에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 관념의 유토피아가 아닌, 살이 찢기는 ‘현실의 사랑’을 위하여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유작이자 불후의 명작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의 입을 빌려 사랑의 참모습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꿈속에서의 사랑은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현실의 사랑은 가혹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실의 고요함 속에서 인류 전체를 사랑하고, 이름 모를 열방의 영혼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고결한 영적 만족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정작 내 옆자리에서 숨 쉬는 구체적인 한 사람, 나와 기질이 도무지 맞지 않고 사소한 생활 습관으로 사사건건 부딪치는 그 ‘불편한 형제’를 견뎌내는 일은 때로 지옥 같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바울이 정의하는 “믿음이 강한 자”(롬 15:1)는 성경 지식의 양이 많거나 종교적 직분이 높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도스토옙스키가 경고했던 그 ‘가혹한 현실의 사랑’을 기꺼이 살아낼 수 있는 사람, 즉 타인의 미성숙함과 치명적인 허물을 비난하고 교정하려 들기보다 그 무거운 죄의 짐을 자신의 어깨로 옮겨 실을 수 있는 ‘영적 근력’을 가진 자를 뜻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를 통해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의 온갖 모욕을 친히 체휼하며 감당하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타인을 위한 대속적(Redemptive) 삶을 선택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진한 향기가 배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나의 정당한 권리를 스스로 유보하고 타인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 이것은 세상의 눈에는 패배처럼 보이지만 십자가가 증명한 가장 위대한 승리의 방식입니다.


🎨 다름의 틈새에 피어나는 예술: ‘서로 받음’의 미학

당시 로마 교회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라는, 도무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두 집단이 위태롭게 공존하던 곳이었습니다. 먹어도 되는 음식과 지켜야 할 절기 문제로 사사건건 충돌하던 그들을 향해 바울은 엄중히 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여기서 ‘받으라(Accept)’는 단어는 상대의 허물을 마지못해 묵인하거나 수동적으로 참아주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나의 가장 친밀한 식탁으로 초대하고, 나의 삶의 영역 안으로 적극적으로 맞아들이라는 ‘급진적 환대’를 의미합니다. 공동체의 갈등은 본래 ‘다름’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고 정죄하려는 우리의 뿌리 깊은 교만에서 싹트기 시작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내부의 갈등이 세상 밖의 싸움보다 더 흉측하고 잔인해질 때, 우리는 복음의 빛을 가로막는 가장 짙은 그림자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요한복음 15장에 나타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상기시키며, 나의 자아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자기 비움(Kenosis)’의 과정 없이는 진정한 연합이란 불가능한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강조합니다.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예언들처럼, 온 열방이 주를 찬송하는 거대한 우주적 오케스트라는 각기 다른 악기들이 자신의 소리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지휘자이신 그리스도의 손끝에 자신의 소리를 세밀하게 조율할 때 비로소 장엄한 하모니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 형제는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또 하나의 독특한 악기’인 셈입니다.


🤝 거룩한 빚진 자들의 연대: 땅끝을 향한 시선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시선을 로마라는 지역 교회를 넘어 서바나(스페인), 즉 당시 인식하던 땅끝으로 확장합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선포하기에 앞서 그가 가장 먼저 몰두한 일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섬기는 실천적 구제였습니다. 이방 지역 교회들이 정성껏 모은 연보를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여정은, 교회가 ‘영적인 빚’과 ‘물질적인 섬김’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로 촘촘하게 연결된 하나의 유기체임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선교는 결코 어느 한 개인의 영웅적인 무용담이 아닙니다. 예루살렘과 이방 세계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빚진 자의 심정’으로 하나 될 때, 비로소 세상을 변화시킬 폭발적인 복음의 동력이 발생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통찰처럼, 오늘날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야성은 거침없는 ‘개척정신’인 동시에, 지체들을 끝까지 품어내는 ‘연합의 영성’입니다.

복음이 닿지 않은 곳을 향해 뻗어 나가는 원심력(Centrifugal)과, 내부의 지체들을 뜨겁게 사랑하여 결속시키는 구심력(Centripetal)이 완벽한 균형을 이룰 때 교회는 비로소 건강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간곡히 고개를 숙였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서로의 영적 안전과 사역의 열매를 위해 진심으로 무릎 꿇는 중보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 에필로그: 소망의 하나님이 여시는 새벽

결국 로마서 15장이 우리에게 남기는 최종적인 메시지는 막연한 낙관이 아닌 ‘확실한 소망’입니다. 갈등은 여전히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우리의 성품은 여전히 모나고 거칠지만,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롬 15:13)**라는 축복의 약속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합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자신의 상처와 억울함에서 들어, 내 곁에 있는 형제의 고단한 얼굴을 바라봅시다. 손에 쥐고 있던 판단의 돌맹이를 내려놓고, 조용히 그를 위해 축복의 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장재형 목사가 전한 말씀의 울림처럼,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용납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해 나갈 때, 찢겨진 관계의 틈 사이로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찬란하게 비춰질 것입니다. 그 사랑만이, 오직 십자가의 그 사랑만이 차갑게 식어버린 이 세상을 녹이고 다시 살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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