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낮아짐과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요한복음 13장 12-1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13장 14-15절에서 주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흔히 알려진 ‘세족(洗足)’이라고 불리는 본문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와 그 의미를 탐구할 때 우리에게 깊은 영적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기셨고, 이를 통해 단순한 도덕적 교훈 이상의 깊은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문화적 배경을 보면, 길이 포장되지 않아 주로 먼지 길을 걷던 사람들은 식사 전에 종이나 하인으로부터 발을 씻기는 예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직접 섬겨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이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일종의 역설적 행동을 보이십니다. 이는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임하신 사건으로,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의 본질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자신의 여러 설교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해질 때, 섬김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라고 강조합니다. 그가 말하는 겸손은 단순히 스스로를 낮추는 ‘자기비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주장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적극적 태도를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행위나 자기연민이 아니라, 가장 귀한 분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심으로써 오히려 하나님 사랑의 위대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신적 겸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성육신의 사건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본체”로 소개하며, 그분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과 같이 되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의 세족 사건은 이러한 신적 겸손의 구체적 예시로 나타나는데, 예수님은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 비움’을 통해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섬김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그 대상이 제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배웠지만, 동시에 여전히 인간적 욕심이나 다툼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기 전, 누가복음 22장 24절 이하를 보면 그들 중 누가 크냐 하는 시시한 다툼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아직 성숙치 못했고, 주님의 마음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이는 바로 아직 연약하고 미성숙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종종 이 본문을 예화 삼아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때로는 우리를 배신하거나 오해하는 사람들까지 섬길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섬김은 상대방이 ‘섬길 만한 가치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길 가치를 이미 부여하는 하나님의 시선’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섬김은 조건이 아니라 은혜에 기초합니다. 상대방이 합당한 태도를 보이든 보이지 않든,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따르는 길이라면 주저 없이 발을 씻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세족은 단지 발을 씻어주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마음과 태도에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라.” 이 명령에는 단순히 ‘발을 물로 씻는 실제 행동’을 넘어서서, 우리의 삶 모든 영역에서 섬김을 실천하라는 부르심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발 씻기는 일은 종의 책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스스로 종의 자리에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이상, 일상생활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겸손히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섬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자아중심성’이 깨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이익과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옛 사람’은 끝없이 자기를 드러내고 높아지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진정으로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가치관과 정면으로 배치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역설의 왕국’입니다. 가장 높아지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하는 역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진리로 작동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종종 ‘낮아짐이 곧 영적 성장의 지름길’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예수님의 세족 사건을 예로 들면서, 겸손과 섬김이야말로 교회 안에 분란이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방법이라고 강조합니다.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면 대부분 자신이 옳고, 자신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서로를 섬기는 태도로 전환할 때, 진실한 화해와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고, 그들을 품어주며, 그들이 밟아온 길의 먼지까지도 씻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낮아짐과 섬김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예수님의 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종교적 열심이나 도덕적 수양만으로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완전한 낮아짐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오직 십자가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갈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또한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상황, 혹은 우리가 손해 보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 그렇다면 기꺼이 낮아지고 섬기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발을 씻어주는 사건에는 또 다른 측면에서 ‘깨끗하게 함’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깨끗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처음에 거부하다가,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까지 말했을 때,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요 13:9-10 참조). 이는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자라도 일상 속에서 죄의 먼지가 묻을 수 있기에, 계속해서 주님의 은혜로 깨끗함을 받아야 함을 상징합니다. 즉, 서로 발을 씻어주는 행동은 서로를 정결케 하는 기도의 마음, 서로를 세워주는 사랑의 마음이 함께 담겨 있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많은 설교에서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줄 때, 그 사람의 연약함이나 죄성까지도 덮어주고 용서하며 세워주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이를 통해 교회 공동체나 성도의 삶이 ‘정결의 은혜’를 나누는 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낮아짐과 섬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근거로 삼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보여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내려놓고 이웃을 섬길 힘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13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세족 사건은 수많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낮아짐과 섬김의 본이 되어 왔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원 운동이나 평신도 운동 등 다양한 영적 부흥 운동들도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자’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 말씀은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는 자기를 높이려는 풍조가 더욱 거세지고, 개인주의와 경쟁이 극심해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변함없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리는 이 말씀을 간직하며, 삶으로 구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낮아짐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며, 이것이 진정한 제자의 길임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심오함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명령은 단지 외형적 섬김을 넘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의 겸손을 요구합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차례 강조한 대로, 교회 안팎에서 이런 섬김의 태도가 회복될 때 참된 부흥이 일어날 것이며, 개인의 영적 성장도 동시에 이뤄질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며, 예수님의 본을 따라 낮아짐과 섬김을 실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서로 짐을 지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롬 13:10 참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 곧 그리스도의 법이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행위는 이 법의 가장 구체적인 예시입니다. “서로 짐을 지라”는 명령은 우리의 실생활에서 ‘서로의 어려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라’는 뜻이요, 그 핵심은 역시 섬김과 나눔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낮아지심으로 섬김을 이루셨다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 섬김이 ‘서로 짐을 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짐이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무게, 즉 죄와 슬픔, 경제적 어려움, 육체적 질병, 영적 갈등 등을 포괄적으로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혼자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누어지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공동체 안에서 기도와 사랑으로 서로를 도울 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한 몸처럼 흘러가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그의 다양한 설교, 특히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에서 자주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함께 짐을 지며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세우길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 문제에만 몰두하거나, 타인의 문제에 무관심하기 쉬운데, 그리스도의 법 아래서는 이기적 태도를 버리고, 이웃의 아픔에 동참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짐을 함께 지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바로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공동체를 견고하게 세우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짐을 지라’는 말의 전제는 ‘짐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와 상처, 부족함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각자에게는 형언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 문제로, 어떤 사람은 건강 문제로, 또 다른 사람은 심리적 고통이나 경제적 궁핍으로 허덕이기도 합니다. 이 짐들은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기 벅찬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진정한 사랑이 실천될 때, 서로 기도를 부탁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나누며,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짐을 나눌 때,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무거운 삶의 책임을 더 이상 혼자 지지 않게 되며, 예수님의 명령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다른 이의 짐을 질 수 있을까요? 첫째, 상대방의 형편과 상황을 알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무관심하게 지내면, 누가 어떤 고통 가운데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좋은 관계와 소통이 전제되어야 상대의 짐을 함께 질 수 있습니다. 둘째, 내가 그 짐을 실제로 나눠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기도로 함께하는 것이든, 물질적 지원이든, 아니면 단순한 위로나 경청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셋째,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도 영적으로 성장함을 깨닫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짐을 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길이기에 그 길에서 우리는 더욱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 6장 2절을 설교할 때, ‘그리스도의 법’이 단순히 머릿속 지식이나 감정적 공감 수준을 넘어, 실제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신 것은, 말로만 사랑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서로 짐을 지라”고 말한 것 또한, 서로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흔히, 교회 내 봉사나 섬김을 이야기할 때, 예배나 행사 진행, 혹은 전도 활동 등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물론 그것들도 중요한 섬김의 영역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누군가가 삶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그를 붙잡아주는 작은 손길이나, 낙심한 영혼을 위해 드리는 한마디 기도가 진정한 의미의 ‘서로 짐을 지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서로의 짐을 지는 공동체는 외형적으로 화려하지 않을지라도, 그 안에는 깊은 영적 유대감과 하나님의 사랑이 흐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짐을 함께 지는 것은 용서와 관용의 태도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서로의 허물을 용납하고 품어주는 마음이 없으면, 금세 분열이 일어나고 갈등이 깊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서로를 용서하고 배려한다면, 교회는 용서의 공동체,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용서는 상대방의 죄나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허물까지도 십자가 사랑으로 덮어준다는 의미입니다. 발을 씻어주는 행위가 상대방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것이듯, 우리도 서로의 죄와 연약함을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해지길 기도하며, 마음으로 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서로 짐을 지는 모습이야말로 교회의 영광스러운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존경받는 것은 화려한 건물이나 조직력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섬김과 사랑의 실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법은 바울이 말했듯 율법의 완성이고, 이 사랑의 법을 이루는 길이 곧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 짐을 지면서, 십자가 사랑을 구체적으로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이제 ‘서로 짐을 지라’는 명령은 머릿속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직장과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서로의 무거운 짐을 감당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자문해봐야 합니다. 혹시 누군가가 힘들어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도할게요”라고 말만 하고 실질적 도움이나 진심 어린 관심은 두지 않았던 적은 없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능동적 행동으로 입증됩니다. 작은 것부터 실천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짐을 나누어 지는’ 도우미가 될 때, 진정한 공동체가 형성되고,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세족 사건은 갈라디아서 6장의 말씀과 하나로 연결됩니다. 낮아지심은 겸손의 태도이고, 서로 짐을 지는 섬김은 그 겸손을 행동으로 옮긴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것”이라 묘사합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기에, 성도들이 일상에서 서로 짐을 지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섬기는 모습이야말로 예수님을 전하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되고,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완전히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짐을 지며 살아가는 삶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더 큰 은혜와 기쁨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의 능력으로는 넘기 어려운 산과 같은 문제를 안고 살지만, 함께 짐을 지는 공동체 안에서는 그 무게가 분산되고, 기도의 힘이 배가되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뚜렷이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짐을 지며 나아가는 교회는, 세상의 어떠한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반석과 같은 믿음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3. 십자가의 길과 참된 제자의 삶
요한복음 13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은 자신을 ‘주’와 ‘선생’이라 부르는 제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를 섬겼으니 너희도 섬겨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덧붙이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몸소 걸어가신 길, 즉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데서 참된 복이 주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와 사망을 영원히 이기는 승리가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주셨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지 본인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제자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부르셨습니다(마 16:24 참조). 즉, 참된 제자의 삶은 고난과 죽음을 동반하는 ‘십자가적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참된 영적 부활과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곧바로 세속적 욕심이나 인간적 교만에 무너질 수 있다”고 자주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의 죄성과 이기심을 철저히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랑할 것이 없고, 누구도 자신을 높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이 빛나고, 그분의 사랑만이 참된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의 삶이란 날마다 십자가로 돌아가, 예수님이 보이신 낮아짐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누가 더 큰가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이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비교의식에 사로잡히고,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인정, 더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길은 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가장 높아지신 분이 가장 낮아지셨고, 왕이신 분이 종의 모습으로 오셨고, 무죄하신 분이 죄인의 자리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따르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삶에서 자신을 비우고, 이웃에게 베풀며, 설령 고난이 따른다 해도 기쁨으로 감당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나타난 세족 사건과 갈라디아서 6장의 ‘서로 짐을 지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데 있어 구체적인 길잡이가 됩니다. 즉, 낮아지고 섬김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야말로 참된 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아닌 행동으로 이를 보여주셨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복’은 세상이 말하는 물질적, 세속적, 일시적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기쁨과 평안, 그리고 구원의 완성에 참여하는 복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다른 여러 설교에서도 “십자가의 길은 고통과 눈물이 없이 걸을 수 없는 길”이라 하면서도, “그러나 그 고난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를 통과하셔야 부활의 승리를 맞이하셨듯이, 우리도 고난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결국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순절 정신’에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삶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우리 안에 있는 교만과 죄성을 회개하고, 다시금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게 하는 기간입니다. 하지만 이 태도는 단지 사순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우리 삶에서 일어날까요? 첫째, 우리 안에 ‘사랑의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도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앞에 머무를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이기심을 빼앗아가시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십니다. 둘째, ‘용서와 화해’가 일어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향해 무지하고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자들을 위해도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려고 애쓰며, 교회 안팎의 갈등도 십자가 사랑으로 해소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셋째, ‘헌신과 순종’이 뒤따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알고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고난이 두렵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셨습니다(마 26:39 참조). 참된 제자는 이처럼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며,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고, 삶의 크고 작은 결정에서 “하나님, 무엇이 주님 뜻입니까?”라고 묻는 태도를 기릅니다. 넷째, ‘겸손과 섬김’의 습관이 몸에 배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늘 깨어있게 만듭니다. 어떤 사역이나 봉사를 하면서도,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드러나도록 낮아지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실제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에는, 지식만이 아니라 순종의 실천이 요구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계하실 때마다 강조하신 것은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알고, 설교를 즐겨 듣고, 찬양에 감동을 받아도, 실제 삶에서 십자가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설교 중에 “예수님의 길은 ‘더하기’의 길이 아니라 ‘빼기’의 길”이라고 역설하기도 합니다. 즉, 세상은 더 많이 쌓고 소유하며 성공을 추구하지만,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비우시며 희생하셨습니다. 이런 역설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십자가 제자의 삶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가치와 충돌하기에 쉽지 않지만, 그 길에는 예수님의 동행이 있고, 궁극적으로 참된 기쁨과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결코 주님보다 앞서거나 주님의 뜻을 넘어설 수 없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요,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때만이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길은 겸손과 섬김, 고난과 희생을 통해 ‘예수님 닮음’을 완성해가는 축복의 길이기도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현장에서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진 자들이야말로 장차 하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릴 것”임을 여러 번 설파합니다. 신앙의 선배들도 이 길을 걸었습니다. 사도들, 순교자들, 그리고 교회 역사 속의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은 그들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겸손히 걸었고,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여러 박해와 어려움을 뚫고도 계속 전해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이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낙심하거나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한가, 왜 고난은 줄어들지 않는가, 왜 선을 행해도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가 등등. 그러나 예수님이 이미 보여주신 길을 떠올리면, 그 길이야말로 ‘생명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부활이 있었고,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생명의 승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이 부활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과 힘든 여정을 ‘영원한 가치’를 위해 견딜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13장 12-17절과 갈라디아서 6장 2절, 그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은 하나의 메시지로 통합니다. 낮아짐(세족)과 섬김, 서로 짐을 지는 사랑,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자의 길이 그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그리스도인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핵심”이라고 부르며, 교회의 존재 이유가 바로 이 복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세상에 증거하는 데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이 본질을 붙들고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섬기며, 서로 짐을 지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을 정리해보면, 첫째,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겸손과 섬김을 통해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둘째, 우리는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말씀대로 서로 짐을 지고 사랑의 법을 성취해야 하며, 이를 통해 교회 공동체가 든든히 서고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셋째, 십자가의 길은 고난과 희생의 길이지만, 참된 제자는 이 길을 기쁨으로 감당하여 부활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복이며, 예수님이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선언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선생으로 고백한다면, 그분의 삶을 단순히 지식으로만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실제로 따라가야 합니다. 발을 씻기는 주님의 겸손한 손길을 기억하며, 지금 내 주변에 누가 힘들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짐을 기꺼이 함께 지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필요하다면 물질적·정신적·영적 도움을 주는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 이기적 욕망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섬김을 실제로 살아내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수차례 역설해온 대로, “낮아짐과 섬김에서 오는 진정한 영광”을 맛볼 것이며, 교회는 세상을 향해 ‘주님의 길’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는 선언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요한이 전한 대로,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신 마지막 순간까지도 타인을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도 끝까지 사랑하는 삶,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삶, 서로의 짐을 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제자의 길이며, 장재형목사가 강조해온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주님의 부활 영광을 함께 누리는 복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