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디찬 쇠창고의 무거운 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침내 열렸다고 해서, 그 안에서 오랜 세월 갇혀 지내던 한 인간의 비참한 감옥 생활이 곧바로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문호 빅토르 위고가 불멸의 명작 《레 미제라블》을 통해 독자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무거운 질문을 던졌듯이, 진정한 해방과 자유가 찾아온 이후의 삶을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습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1장의 깊은 본문을 따라,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신 놀라운 자유가 이웃을 향한 따뜻한 사랑의 질서와 구체적인 배려로 이어지지 못할 때, 그 믿음의 공동체는 오히려 그 자유의 참된 의미와 생명력을 모조리 잃어버릴 수 있음을 날카롭게 경고합니다.
이 거룩한 설교가 우리의 가슴에 단단히 붙들어 매는 영적 핵심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옥죄는 차가운 규율이나 율법주의를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오직 은혜로 거저 얻은 그 엄청난 자유가 어떻게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마음을 온전히 닮아 가며 상처 입은 공동체를 살려내는 생명의 능력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공동체는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남녀와 신분의 모든 장벽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놀라운 영적 자유를 온몸으로 경험했지만, 철없는 그 자유가 당시의 엄격한 사회적 관습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교우들 사이에 불필요한 오해와 거친 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의 거대한 흐름은 결코 성도들을 향해 자유를 포기하고 다시 율법의 종노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유가 자기 중심성에 갇혀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리고 복음의 영광이 세상 속에서 아름다운 질서의 옷을 입고 드러날 수 있도록 더욱 깊이 성숙하라고 애정 어린 권고를 건네냅니다.
참된 교회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안에서 세상의 부패한 가치관과 완전히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현실과 아예 아무런 관계도 없는 완전히 고립된 무인도 같은 공간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이 가져오는 진정한 새로움은 언제나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의 언어와 구체적인 관습 한가운데서 싱싱하게 드러나야 하며, 신앙인은 그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끝까지 지켜내야 하고 무엇을 사랑으로 양보해야 하는지 매 순간 영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1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이러한 행동이 과연 신앙 안에서 허용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얄팍한 율법적 허용 여부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대신 “나의 이 선택과 행동이 과연 세상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을 제대로 보여 주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무너져 가는 공동체를 진정으로 살려내고 있는가”라는 훨씬 더 깊고 본질적인 책임의 자리로 우리를 거룩하게 이끌어 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자신이 오직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믿음의 성도들도 자신을 바라보며 본받으라고 아주 담대하게 권면합니다. 이 짧지만 묵직한 한 문장은 앞서 복음의 진리를 다루던 논의들과 뒤이어 치열하게 펼쳐질 예배의 태도와 성찬의 거룩한 문제를 단단히 이어주는 중심축의 역할을 합니다. 교회의 수많은 복잡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첫 번째 원리는 세상의 규정을 끊임없이 더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시선을 오직 그리스도의 삶을 향해 고정하는 데 있습니다. 자기 희생과 십자가의 사랑, 세상의 모든 보좌를 버리신 비움과 겸손,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심으로 드러난 그 구원의 길이 바로 공동체의 모든 판단을 내리는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본받는 참된 믿음은 개인의 골방이나 내면적인 감정에만 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예배의 거룩한 태도, 남녀 성도가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며 대하는 방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봉사와 온유한 나눔, 그리고 건강한 공동체의 질서를 아름답게 세워나가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그 그리스도의 향기가 구체적인 모양으로 드러나야 마땅합니다. 만약 우리의 자유가 오직 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기적인 언어로만 남아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밀어내게 되지만,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순종 안에서는 그 자유가 도리어 연약한 타인을 끝까지 살피고 품어주는 눈부신 능력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허락한 참된 자유는 내가 세상 앞에서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힘으로 증명하는 억지 힘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내 권리와 자존심을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거룩한 힘입니다.
정말로 영적으로 성숙한 믿음은 내가 세상 법정이나 교회 안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그 좁은 경계선만 차갑게 계산하지 않습니다. 내가 떳떳하게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권리라 할지라도 그것이 믿음이 연약한 다른 형제의 마음을 심하게 흔들고, 조용히 평안을 누려야 할 공동체의 거룩한 평화를 깨뜨린다면, 나는 과연 그 권리를 어떤 방식으로 행사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다시 신중하게 살피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자유라는 위대한 가치를 두려워하거나 억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그 사랑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자유는 나 자신의 영향력을 끝없이 확장하기 위한 세속적 도구가 아니라, 연약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게 허락하신 가장 눈부신 은혜의 넓은 공간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단순히 위에서 군림하며 명령만 내리는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십자가의 복음적 삶을 온몸으로 살아낸 훌륭한 모범이 되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합니다.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화려한 가르침과 지도자의 실제 삶의 모습이 서로 어긋나고 모순될 때, 세상과 공동체는 고상한 말의 잔치보다 그 씁쓸한 어긋남을 먼저 정확히 알아봅니다. 그러므로 “나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당당한 권면은 결코 자신의 인간적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해 남들보다 먼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영적 지도자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가장 무겁고 두려운 책임감의 고백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절부터 16절에 등장하는 당시의 머리와 너울을 둘러싼 논쟁은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다소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깊이 있는 설교는 그 난해한 본문을 남성의 부당한 우월성이나 여성의 억압적인 종속을 정당화하는 고루한 규범으로 결코 읽지 않습니다. 당시의 고대 사회 속에서 여성이 공식적인 공적인 자리에서 너울을 쓰는 행위는 정숙함과 가문의 명예를 나타내는 중요한 사회적 표지로 널리 인식되었고,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절대적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지혜로운 범위 안에서 당시의 건전한 관습을 존중하고 고려하도록 권면했던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세상의 맹목적인 관습에 아무 생각 없이 넙죽 엎드리는 비겁한 복종도 아니며, 그렇다고 ‘자유’라는 거대한 이름을 함부로 내세우며 세상의 모든 질서와 관습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도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는 거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혼자 숨어 사는 외딴섬이 아니라, 바로 그 죄악이 가득한 세상의 한복판에 깊숙이 들어가 십자가의 복음을 용기 있게 증언하는 살아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진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면서도, 복음 때문에 생기는 불필요한 오해를 지혜롭게 줄이고, 연약한 공동체의 거룩한 유익을 위해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는 성숙한 영적 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공동체가 지켜야 할 질서가 서로를 파괴하는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 안에서 손을 잡고 함께 든든히 서야 할 두 개의 거룩한 기둥으로 제시되는 명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곧이어 주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만 따로 있지 않고 또한 여자 없이 남자만 따로 있지 않으며, 만물이 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이 품고 있는 진정한 메시지는 남녀 사이의 타고난 차이를 가지고 어느 한쪽이 우월하다는 서열로 단단히 굳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서로가 서로를 떠나서는 결코 온전할 수 없는 상호 의존적이고 평등한 관계임을 낱낱이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갖 차별의 벽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지만, 그렇다고 그 자유가 상대방의 고유한 인격과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이기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까지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깊이 필요로 하고, 존중하며, 함께 손잡고 자라나는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하늘의 질서가 비로소 환하게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진정한 평등이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와 고유성을 무식하게 몽땅 없애버리는 획일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록 서로 다를지라도 그 어떤 차이를 이유로 한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함부로 낮추지 않겠다는 거룩한 질서입니다. 인간의 상보성은 서로의 부족한 필요를 기꺼이 인정하고 함께 협력하여 풍성한 영적 유익을 이루어내는 관계로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 설교가 그토록 끈질기게 강조하는 복음적 균형은 어느 특정 집단의 권리를 억지로 약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관계를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은 존귀한 존재들의 상호 존중이라는 십자가의 대원칙 아래 다시 곱게 내려놓는 데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후반부에 이르면 성경의 예리한 시선은 이제 조용히 거룩한 성찬의 식탁으로 깊숙이 옮겨 갑니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한자리에 모이긴 했지만 진정으로 하나가 되지 못했고, 애사랑을 나누는 공동 식사의 자리에서 어떤 부유한 이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맛있는 음식을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먼저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는 동안,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철저히 소외되어 굶주려야만 했습니다. 떡과 잔은 원래 주님의 찢긴 몸과 흘리신 보혈의 피를 눈물로 기억하게 하는 거룩한 상징이어야 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모인 식탁의 현장에서는 자기 희생과 이웃을 향한 나눔의 따뜻한 정신이 완전히 증발해 버려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거룩한 예전과 성도들의 이기적인 공동체 현실 사이에 엄청나고 깊은 균열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그날 밤 그들이 마주한 진짜 심각한 문제는 성찬의 복잡한 절차나 순서를 정확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지엽적인 데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입술로 장엄하게 기념하던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과, 그들이 매일의 삶에서 실제로 대하던 가난한 형제의 비참한 삶이 서로 완전히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요한 자의 풍성한 배부름 바로 곁에 가난한 사람의 비참한 굶주림이 철저히 방치될 때, 그 공동체는 겉으로는 거룩한 한 식탁에 나란히 앉아 있을지라도 결코 십자가의 주님의 몸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 허울뿐인 모임이 되고 맙니다. 성찬식은 인간의 추한 위선과 불의를 교묘하게 가려주는 두꺼운 장막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내는 진리의 눈부신 빛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성찬이란 단순히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행하는 무미건조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를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 시청각적 상징 예전입니다. 주님의 찢기신 희생을 기념한다는 것은 그 십자가 사건을 머릿속으로 아련하게 떠올리는 감상적인 추억에서 결코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목마른 형제를 따뜻하게 기다려 주고, 광야에서 쓰러진 약한 이를 친히 살피며, 내게 주신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나누고,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품을 넓히는 구체적인 실천의 삶으로 반드시 이어져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거룩한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내 곁의 이웃을 냉정하게 배제하고 외면한다면,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뜨겁게 기념하면서도 실제의 삶으로는 그 거룩한 사랑의 의미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끔찍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바로 이 준엄한 대목에서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오늘날 차갑게 식어버린 교회의 영적 상태를 거룩한 성찬의 식탁 앞에 정직하게 세웁니다. 과연 이 세상에서 누가 더 많은 재물을 가졌는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먼저 도착했는지, 누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중심에 우뚝 서는지 따지는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희생이 우리의 차가운 관계 속에서 과연 실제로 어떤 구체적인 모양을 얻고 있는지가 엄숙하게 질문됩니다. 주님의 떡을 떼어 나눈다는 것은 결국 내 남은 삶의 자리를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이며, 구원의 잔을 받는다는 것은 이웃의 눈물 어린 아픔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다는 영혼의 엄숙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거룩한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철저히 살피고 돌아보라고 단호히 권고합니다. 이 깊은 자기 성찰은 단순히 내 개인적인 감정의 기복이나 들여다보고 혼자 우울해하는 소심한 내면 탐구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혹시 불의한 차별과 부당한 불균형, 그리고 서로를 향한 사랑의 결핍이 소이지 않게 자라나고 있지 않은지 정직하게 묻는 거룩한 작업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거친 바다를 향해 거창한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전에 먼저 우리 눈앞의 교회 안에서 그 복음의 생기가 실제로 살아 숨 쉬고 있는지 철저히 확인해야 한다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자신을 깊이 살핀다는 이 성경적 가르침이 모든 책임을 오직 한 개인의 연약한 양심 속에만 가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반복해서 소외되고 상처를 받으며, 믿음이 연약한 이들이 따뜻한 기다림 없이 거칠게 밀려나고, 힘 있고 가진 자들의 편의가 공동체의 보편적 기준이 되어 버리고 있다면 그 구조적인 모순 역시 당연히 매서운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성찬의 거룩한 떡 앞에서 행해지는 참된 성찰은 그저 지나간 날을 아쉬워하는 감상적인 후회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관계의 방향과 공동체의 부서진 질서를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새롭게 다시 세우는 데까지 기쁘게 나아가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따뜻하고도 예리한 설교는 이러한 철저한 성찰을 우리를 찌르고 짓밟기 위한 두려운 정죄의 심문으로만 결코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그동안 처참하게 무너졌던 영적 질서를 바로잡고, 가장 약한 자와 병든 자가 교회 구석에 방치되지 않도록 공동체를 다시 건강하고 탄탄하게 세워가는 생명의 회복 과정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뜨거운 예배와 헌신적인 봉사, 물질을 사용하는 재정의 거룩한 집행, 세상의 이웃을 대하는 우리의 부드러운 태도, 그리고 급변하는 사회적 문제의 거친 파도 앞에서 우리가 보이는 반응까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질문 아래 엄숙하게 놓입니다. 우리가 기쁘게 지키려는 진리가 과연 세상 앞에 진정한 사랑과 배려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이 고귀한 자유가 공동체를 단단히 세우고 복음의 눈부신 빛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가.
이 설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참된 질서는 사람을 옥죄기 위한 억압적인 통제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막힘없이 흘러갈 수 있도록 거룩한 길을 활짝 열어 주고, 서로의 고귀한 존엄성을 지켜 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우리의 지친 일상 속에서 생생하게 기억되도록 돕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형식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잃어버린 차가운 질서는 인간의 생명을 질식시키는 억압의 틀이 되고, 질서를 완전히 상실한 방종한 자유는 공동체에 끝없는 혼란과 추한 분쟁을 낳기 쉽습니다. 참된 복음적 성숙은 이 둘을 억지로 갈라 세우는 데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는 따뜻한 마음 안에서 하나로 묶어내는 데 있습니다.
결국 고린도전서 11장은 우리에게 머나먼 옛날의 낡은 복장 규정이나 복잡한 성찬 절차만을 가르쳐 주는 고고학적 본문으로 영원히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 공동체가 과연 어떤 눈부신 얼굴로 세상 앞에 당당히 설 것인지 우리 자신에게 묻게 만듭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거창한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내 곁의 누군가를 날카롭게 소외시키고 있지 않은가. 거룩한 주일을 맞아 화려한 예배를 드리면서도 정작 그리스도의 찢기신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구체적인 인간관계와 나눔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남기는 마지막 깊은 여운은 크고 넓은 공동체를 향하면서도 동시에 고요히 한 사람의 단독적인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옵니다. 내가 지금 내 인생의 손에 꽉 쥐고 놓지 않으려는 나의 정당한 권리와 세상의 익숙한 방식, 그리고 내가 언제나 옳다고 확신하는 그 고집스러운 태도는 과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 성찬의 거룩한 떡과 잔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을 깊이 살피듯, 오늘 내 삶의 식탁과 거친 말과 작은 선택의 순간들 속에도 복음의 생기가 아름다운 질서 속에 흐르고 있는가. 그 거룩한 질문 앞에 묵묵히 오래 머물 줄 아는 사람의 메마른 영혼 위에서 비로소 참된 자유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얼굴을 활짝 피워내기 시작할 것입니다.